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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동안의 휴가
“큰 병원에 한번 가 봐요. 병 키우지 말고.” 소주잔을 꺾으며 후배가 내뱉었다. “병은 무슨. 그냥 좀 심한 감기 몸살이겠지. 사람이 죽으려면 보약 먹고 몸 챙기다가도 교통사고로 가는 거야. 팔자대로 살다 가는 거지, 뭐.” 이렇게 말하면서도 이상하긴 이상했다. 내일은 이비인후과를 한번 가 봐야지. 사실 몸이 아픈 건 그리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그보다는 어려워진 사업이, 부쩍 자주 다투고 서먹해진 아내와의 관계가 더 힘이 들고 고통스러웠다.

다음 날 찾은 이비인후과에서는 편도선염이라고 했고 약을 먹은 후 거짓말처럼 열이 사라졌다. 그러나 이후로 여러 날을 약이 떨어지면 다시 열이 나는 일이 반복되었다. 운동 부족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사무실에서 맨손체조를 하기 시작했다.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기를 40번쯤, 갑자기 어지러워서 바닥에 쓰러져 잠시 정신을 잃었다. 한 2~3분이나 흘렀을까 정신을 차리고 앉았는데 왼쪽 뺨 쪽이 얼얼했다. 덜컥 겁이 났다. ‘중풍이 온 걸까?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지? 애들 엄마한테는 또 뭐라고 말해야 하나?’

서둘러 집으로 가 피곤하다는 핑계로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불안감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다음 날 오후 종합병원을 찾았고, 이비인후과 의사 선생님은 원인불명의 열이라며 감염내과로 가보라고 했다. “입원하셔야 합니다. 감염성 심내막염입니다. 심장 판막이 세균에 감염되어 균 덩어리가 붙어 있어요. 만약 잘못돼서 그 덩어리가 떨어져 나가 뇌혈관이라도 막으면 죽을 수도 있어요. 일단 항생제 치료를 하면서, 심하면 수술해서 균 덩어리를 제거해야 해요.” 내과 의사의 만약이라는 말에 포함된 삶과 죽음이 너무도 쉽고 허망하게 들렸다.

병원 문을 나서면서 애써 담담하게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내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고마웠다. 아내의 마음속에 진심으로 내가 필요한 사람임이 느껴져 왔다. 그래 우리는 가족이니까. 그렇게 위기는 다시 하나가 되는 묘한 능력이 있었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 나는 병원에 입원했다. 열은 계속됐고 힘들었지만 희한하게도 마음만은 편했다. “열나고 머리 아픈 거 빼면 내가 어디 환자야? 그러니 애들만 두지 말고 집에 가. 당신 여기 있으면 당신도 병 나.” “내 걱정 하지 마. 오늘은 첫날이니까 나 여기서 자고 갈 거야. 나도 당신 아프다고 생각 안 해. 같이 특별한 휴가여행 온 거 같아.” 아내가 애써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고 오랜만에 우리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마침내 5일째 되던 날 검사 결과가 나왔다. “의심이 가던 원인균을 찾았습니다. 심장 판막에 붙어 있던 균 덩어리 중 일부가 떨어져 나와 뇌혈관을 막아 잠시 뇌경색이 왔던 겁니다. 그러나 문제는 나머지 큰 덩어리예요. 수술해서 제거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어요.” 갑자기 밀려오는 불안감에 나는 나도 모르게 막다른 골목에서 찾게 된다는 절대자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비로소 내 옆의 환자들을 둘러보았다. 6인실 병실의 분위기는 의외로 밝았다. 오랜 투병 생활로 피곤함이 역력했지만 그것 말고는 서로를 위로하며 격려해 주는 모습이 한 가족 같았다. 몇 분 전의 불안감은 자취를 감추고 이 모든 상황이 내게 겸손과 감사를 가르치고 있었다. 약함과 부족함이 주는 감사의 의미가 실감되었다.

오후 늦게 아내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마침 담당 선생님이 들어와 수술 날짜가 잡혔다고 알려 주었다. “수술하면 인공 판막을 달아야 하는데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동물성 판막으로 10년 정도 쓰면 다시 갈아야 해서 보통 나이가 드신 분들에게 많이 권하죠. 두 번째는 기계 판막으로 영구적인 데 반해 몸에서 거부반응을 일으켜 와파린이란 약을 평생 드셔야 해요. 음식도 많은 제약을 받지요. 아마도 젊으시니까 기계 판막으로 하시게 될 거예요.” 선생님이 나가고 아내와 나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창밖만 바라보았다. 피곤함이 밀려왔다.

한 시간 남짓 잠이 들었었나 보다. 아내는 안쓰러운 듯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잤어? 당신 자는 모습 보며 많이 생각했어. 모든 게 잘 될 거야. 당신 수술 받고 나오면 우리 네 식구 행복하게 살자. 그동안 내가 짜증내고 못되게 군 거 미안해. 산다는 게 지겨울 때가 있잖아. 아마 똑같은 일상에 내가 지쳤었나 봐. 이제 아프지 마!” 아내의 눈엔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였다. 곱게 잡은 아내의 손끝에서 사랑이 느껴졌다. 마음이 평화로웠다. 수술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졌고 신기할 정도로 아무 걱정이 없었다. 오히려 신이 주신 육신의 고통이 축복처럼 느껴졌다. 시간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지만 사랑은 늘 우리를 용서와 화해로 되돌려 놓는다.

이윽고 수술 당일. 아내는 수술실로 들어가는 내 손을 꼭 붙들고 애써 밝게 웃어 준 후 수술실 문 사이로 꿈처럼 멀어져 갔다. 내가 3일 동안의 긴 잠에서 깨어났을 때, 아내가 머리맡에서 울먹이며 말했다. “지운 아빠. 이제 정신이 들어? 고생했어. 당신 기계 판막 안 넣었대. 판막 성형으로 수술했대. 평생 약 먹고살지 않아도 된대.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나의 혀끝으로도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이 하염없이 맴돌고 있었다.

- 『희망나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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