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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력거를 탄 어머니의 부활
“수술을 받기 위해 어머니는 서울로 가셨다. 이른바 대동아 전쟁이 한참 고비였던 때라 마취제도 변변히 쓰지 못한 채 수술을 받으셨다고 한다. 그런 경황에서도 어머니는 나에게 예쁜 필통을 사 보내 주셨다. 필통은 입원하시기 전에 손수 골라서 사신 것이지만 귤은 병문안 온 손님들이 전시에 어렵게 구해서 가져온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목이 타시는데도 귀한 것이라고 잡수지 않으시고 그냥 머리맡에 두고 보셨다고 한다. 퇴원하실 때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노란 귤과 함께 어머니는 하얀 상자 속의 유골로 돌아오셨다. 물론 그 귤은 어머니도 나도 형도 먹을 수 없는 열매였다. 그것은 먹는 열매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랑의 태양이었고 그리움의 달이었다. 그래서 향기로운 그 몇 알의 귤은 누구도 먹지 못한 채로 어머니와 함께 흙에 묻혔다.”

그 후로, 내가 일상적으로 드렸던 기도는 어머니께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나의 종교였으며 어머니 앞에서 기도를 할 때마다 나는 열 한 살짜리 아이가 됩니다. 기쁜 일이나 궂은 일이나 일이 생기면 언제고 어머니에게 기도를 드리며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내가 기독교에 귀의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도 바로 그 점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내 앞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지척에 계신 어머니를 버리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 먼 곳의 하나님만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동양적 조상숭배의 종교적 차원이 아니더라도 기독교와 가족주의 사이에는 공존할 수 없는 어떤 깊은 구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백 살에 아들을 얻어 기뻐할 때 하나님은 그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합니다. 그 명령에 복종하기 위해서 모리아 산에서 독자 이삭을 결박한 후 칼을 들고 죽이려 하지요. 이 장면에 이르면 상상만 해도 입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올 것만 같습니다.

가족을 경시했기에, 자식을 사랑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풍습이 없어서 이런 일이 생긴 것은 아닐 것입니다. 가족의 사랑과 공경이 이 지상에서 가장 숭고하고 값어치 있는 길이었기에 하나님은 그것을 초월하는 마지막 고개의 시험을 부과하신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혈육의 낡은 가정관을 사랑과 믿음, 하나님 아버지의 가족으로 확장하고 승화한 것이 예수님의 가정관이었고 기독교 가족관입니다. 더 큰 가족 더 신성하고 사랑과 믿음으로 뭉친 공동체. 그것이 때로는 불경으로 들리고 가족 경시로 오해된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나는 다시 어머니를 만납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년쯤 되었을 것입니다. 고개를 넘어 학교를 가고 있는 중이었지요. 온천읍으로 가는 신작로 앞에 웬 인력거 한 대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수술을 받으시기 위해 서울로 떠나시던 날에도 그런 인력거를 타고 읍내로 나가셨지요. 그런데 신작로 길로 오던 그 인력거가 나를 앞질러 가더니 갑자기 멈추는 거예요. 그리고 나를 불러요. 인력거에서 내린 모분단 두루마기를 입은 귀부인이었습니다.

그 귀부인은 내 손을 잡고 “네가 용인댁 다섯째지?”라고 물으셨어요. 그냥 나는 머리로만 끄덕였지요. 혼잣말처럼 무어라고 몇 마디 하시고는 “어디 좀 보자”라고 내 책보를 끌러서는 도시락을 열어 보시는 거예요. 그러고는 잡곡이 얼마나 섞였는지 반찬으로 무엇을 넣어주었는지를 샅샅이 살펴보십니다. 잠깐 눈에 이슬이 맺히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 알았다! 학교 늦을라. 어이 가봐라. 잘 커서 다음에 꼭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너의 어머니가 먼 세상에서 얼마나 기뻐하시겠니.” 어머니가 떠나시던 그날처럼 인력거는 아침햇살에 은빛 바퀴살을 반짝이면서 읍내 쪽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때는 잘 몰랐지요. 어린 아이를 놔두고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분 같았습니다. 남은 식구들이 도시락을 잘 싸주는지, 어린 것이 구박이나 받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남의 아이의 책보를 끌러 도시락 반찬을 살펴보는 그 마음을 그때는 잘 몰랐습니다. 나는 내 도시락 뚜껑을 열어보신 그 여인의 이름을 모릅니다. 확실한 것은 만약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 길목에서 나를 만나셨더라도 그 여인과 똑같이 내 손을 잡고 그리고 내 책보를 끌러 보시면서 내가 잘 자라고 있는지 보살펴 주셨으리라는 것이지요.

십자가상의 예수께서 사랑하는 제자에게 “보아라 여기 너의 어머니가 있다”고 말한 바로 그 만인의, 세계의, 우주의 어머니가 인력거에 타고 계셨던 것입니다. 자기 가족만이 아니라 이웃으로 쏠린 사랑과 정의 근원에 있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도시락 뚜껑을 열던 그 여인의 손끝에서 나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손을 보았습니다. 그 여인의 이슬 맺힌 축축한 눈에서 어머니의 눈동자를 보았습니다.

그 사랑은 지성이 아니라 영성을 관장하는 세계이고 그 영성은 하늘나라의 빛과 접속할 수 있는 통로입니다. 이것이 나에게 무릎을 꿇게 하고 성수로 영혼을 씻게 한 그 사랑이요 그 권능입니다.

- 『지성에서 영성으로』 중에서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304쪽 /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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