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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거예요
어느 날 저녁, 내 딸이 친구 집에서 가진 모임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같은 반 아이들끼리 TV로 수퍼볼을 보러 모인 자리였다. 대문이 잠겨 있어서 딸은 초인종을 눌렀다. 문을 열어 주는데 머리 꼭대기부터 발끝까지 슬픔에 차 있음을 대번 알 수 있었다.

“모임 어땠니?” 내가 물었다. “좋았어요.” 딸이 눈을 내리깔고 대답했다. “너 괜찮니?” 내가 또 묻자 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러자 다시 고개를 끄덕인 뒤 아래층 자기 방으로 갔다.

겉모습만 보고도 속에 상처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적어도 당장은. 저녁 늦게 딸은 우리 부부가 있는 부엌에 와 그릇에 아이스크림을 담았다. 내가 팔로 감싸 주며 무슨 일인지 묻자 눈물부터 터졌다. 딸은 울며 말했다. “학교 애들이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아요.” “그건 그렇지 않지.” 내가 위로하려 말했다. “널 좋아하는 애들도 많잖아.” “아니예요, 그렇지 않아요.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아요. 어쩌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별 수 없이 한 마디 하는 거지, 속으로는 날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요. 학교 다닌 지 2년이나 됐어요. 그런데 아무도 나를 알고 싶어하지 않아요. 아무도.”

나는 우는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그런 말을 듣고 있으려니, 우리가 사랑하는 이 소중한 아이가 그렇게 자신이 못났다며 절망에 빠져 울고 있는 것을 보려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잠시 후 아이의 눈물이 그쳤다.

눈물이 그치자 아내와 나는 딸과 함께 그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예수님 얘기를 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당하신 거절에 대해 이야기했다. “고향에서도, 친구들과 가족들로부터도 그분은 거절을 당했지. 그분에게는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것이 참 많았단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고, 시간이 없었고, 속마음을 보는 데 관심이 없었으며, 갈 데가 많았고, 주변에 더 중요하고 더 재미있는 사람들이 많았지.”

우리말이 도움이 되었나 보다. 우리는 딸에게 원한다면 다음날 학교를 쉬어도 좋다고 했다. 딸은 그렇게 하기로 했다. 한결 기분이 좋아진 딸은 나에게 발코니 욕조에서 반신욕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좋지.” 나는 말했다. 반짝이는 별빛 아래 함께 욕조에 앉아 나는 딸에게 작가로서의 내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심혈을 기울여 쓴 작품인데 몇 달 후 거절의 공문을 받을 때 기분이 어떤지 말해 주었다. “그런 편지를 받으면 진짜 읽어 보고, 아니 대충 훑어보기라도 하고 하는 말인지 의아한 생각이 들지. 원고 안에는 하고픈 말이 참 많은데, 사람들은 너무 바빠 읽지도 않고는 ‘다른 출판사와 좋은 결과 있기 바랍니다’라는 말로 나를 외면해 버린단다.”

나는 그렇게 거절당하는 기분이 어떤 것이며, 오랜 세월 직업 작가로 지내 왔는데도 그런 일이 아직도 상처가 되고 있음을 털어놓았다. 내가 딸의 아픔 속에 들어간 것이 이번에는 딸이 내 아픔 속에 들어오는 계기가 되었다. 거기, 아픔을 나누는 곳에 진실한 교제가 있었다. 전에 모르던 깊은 이해의 느낌이 있었다. 상대방은 물론 그 사람의 아픔에 대해서까지 깊은 인식이 생겨나고 있었다. 아픔이라는 것이 우리를 빚어 가는 성스러운 도구가 된다는 것에 대해서도.

딸은 물에서 나와 욕조 난간에 앉아 몸을 식혔다. 그리고는 나의 가치관을 온통 뒤집어 놓고야 말 질문을 하나 던졌다. “내일 뭐 하세요?”

사실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초청이었다. 자기와 하루를 함께 보내 주기 원하면서도 내가 너무 바쁘다면 부담 주고 싶지는 않은 눈치였다. 사실 나는 바빴다. 일이 밀려 있어서 열심히 따라잡는 중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그것이 하나도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속에 뭔가 성스러운 것이 담겨 있음을 나는 깨달았다. 정확히 뭔지는 몰랐지만 뭐가 아닌지는 알았다. 적어도 일은 아니었다. “너만 쉬는 날을 갖는다면 공평하지 않겠지. 우리 둘 다 하루 쉬고 온종일 함께 보내면 어떨까?” “좋아요.” 딸애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좋다.”

딸은 욕조에서 나와 수건을 집어 들면서 말했다. “아빠, 오늘 밤은 평생 잊지 못할 가장 소중한 추억이 될 거예요.”

이튿날 우리는 별말이 없었다. 인생 얘기는 전혀 없었다. 그냥 재미있게 하루를 같이 보냈다. 세차장에 들르고, 아내의 심부름 몇 가지를 한 다음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는 백화점에 가서 선글라스를 하나 사고 거기서 해리슨 포드가 나오는 영화 <사브리나>를 보았다. 그리고 집에 왔다.

하루 종일 나는 지난밤 딸이 했던 말을 생각했다. 지금도 생각한다. “아빠, 오늘 밤은 평생 잊지 못할 가장 소중한 추억이 될 거예요.”

그런 말을 들으면 ‘올해의 아버지’라도 된 기분에 젖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반대였다. 그 말을 음미하자니 슬픔이 몰려왔다. ‘딸과의 시간을 자칫 놓쳐 버릴 뻔했다. 딸이 평생 잊지 못할 그 추억을. 사실 지금까지 그렇게 놓쳐 버린 순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딸과는 물론 아내, 친구들, 다른 식구들과의 사이에...’ 그런 시간의 상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삶과 나 자신의 삶에서 그렇게 놓쳐 버린 순간들이 나를 슬프게 했다.

슬픔은 결심이 되었다. 걸음을 늦추기로 했다. 그런 순간들이 찾아올 때 알아볼 수 있도록. 그리고 그 앞에 걸음을 멈추기로 했다. 그런 순간들을 존중할 수 있도록. 반응하기로 했다. 내가 그런 순간을 만지고 그런 순간이 나를 만지게 하지 않고는 그냥 보낼 수 없기에.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다.
인생은 너무 짧다.
그리고 너무 성스럽다.


- <묵상하는 삶>(켄 가이어 지음, 두란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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