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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성과를 포기해야 하는 어려움
『창조적 파괴』(리처드 포스터 외 지음 / 21세기북스) 중에서

1985년 중반 인텔 사장인 앤디 그로브는 마지막 남은 D램(DRAM) 메모리 칩 제조공장을 방문했다. 그리고 거기서 앞으로 D램 메모리 칩 생산을 중단겠다고 발표했다. 한때 인텔은 D램 메모리 칩 분야에서 세계시장을 주도했다. D램 메모리 칩은 1968년 인텔을 탄생시킨 원동력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83년 무렵 D램 메모리 칩 시장은 공급과잉 상태에 놓여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일본 기업들이 정보혁명의 심장을 구성하는 분야에서 세계시장을 석권하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D램 메모리 칩을 고수했다가는 인텔도 파산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러한 자명한 현실 앞에서도 의사결정을 내리는 일은 너무도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1968년 인텔이 설립될 당시 반도체 메모리 칩은 여러 면에서 타기업의 메모리 칩을 능가했다. 당시 반도체 메모리 칩은 메모리 칩 산업에 불어온 새로운 폭풍이었다. 1972년 인텔의 1킬로바이트 1103D램 칩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집적회로였고 당시 인텔 매출의 90% 이상을 차지할 정도였다. 최초 시장 개척자로서 인텔의 메모리 칩 시장 점유율은 거의 100%에 달했다. 그래서 1970년대 말 앤디 그로브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인텔은 메모리 칩산업을 대표한다. 마찬가지로 메모리 칩은 인텔을 의미한다."

그러나 1980년대 초 일본의 대형 반도체 메모리 칩 제조업체들이 고품질 저비용 제품으로 물량 공세를 취하면서 미국시장에 진입했다. 후지쓰, 도시바, NEC, 히타치 같은 기업들이었다. 더구나 기술이 계속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텔은 경쟁자를 앞지르기 위해 연구개발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했다. 그러던 와중 반도체 메모리 칩이 널리 확산되고 가격이 폭락하자 주주수익률도 크게 하락했다. 과잉공급이 초래한 가격 폭락의 전형적인 예였다. 1984년 여름 3개월 동안에만 반도체 메모리 칩 가격이 40%나 하락했고 사업 전체의 성과도 큰 폭으로 떨어졌다. 특히 인텔은 반도체 메모리 칩 의존도가 높아 그 성과가 산업 평균보다 더 떨어졌고 이는 총주주수익률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1984년 가을까지 반도체 메모리 칩의 가격이 하락하자 인텔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그래서 인텔 회장인 고든 무어와 사장 앤디 그로브는 수차례에 걸쳐 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반도체 메모리 칩 분야의 어두운 미래에 대해 아무리 토론을 해도 의견일치를 보지 못했다. 후일 그로브의 회고에서 알 수 있듯이 반도체 메모리 칩 사업을 중지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설립자와 경영진은 메모리 칩에 대한 감정적 유대감 때문에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인텔을 정상에 올려놓은 메모리 칩 사업을 차마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잔인하고 불만스러운 해가 절반쯤 지났을 때였다. 어느 날 둘만의 자리에서 그로브가 무어회장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만약 이사회가 우리 대신 새로운 회장을 임명한다면 그 새로운 회장은 가장 먼저 무엇을 할까요?"
무어가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아마 우리를 세간의 기억에서 지워버릴 걸세."
잠시 침묵이 흐른 후 그로브가 다시 물었다.
"우리가 저 문을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직접 그 일을 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은유적인 질문을 계속한 인텔의 두 리더는 길고 고통스러운 조치를 취하였다. 이로써 결국 인텔의 핵심 사업은 사라졌다. 후일 그로브는 올바른 전략적 방향을 결정했음에도 핵심 직원들의 정신 모델 속에 반도체 메모리 칩이 너무 깊이 자리잡고 있어서 실행하기가 불가능할 지경이었다며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인텔은 곧 메모리 칩 자체였다. 메모리 칩 없이 인텔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이는 문화적 폐쇄성의 전형적인 예이다. 참고로 나중에 앤드류 그로브는 이를 전략적 변곡점이라고 불렀다.

인텔은 반도체 메모리 칩 사업을 없애기 위해 자본 배분 시스템을 구축해 메모리 칩 사업에 대한 투자를 점차 줄여나갔다. 그 결과 1984년에는 반도체 메모리 칩 생산 설비로는 유일하게 오리건 주의 조립 공장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인텔의 최고 경영진이 반도체 메모리 칩 생산을 중지하기로 결정했음에도 메모리 칩에 대한 연구개발비는 총 연구개발비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다.

후일 그로브는 고위경영진이 주저하면서 메모리 칩 사업을 포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점진적으로 메모리 칩 사업을 사장시킬 수 있었던 것은 공격적인 중간관리층 덕분이라고 말했다. 고위경영진에게 방향을 제시한 중간관리자들의 노력과 시장에 밀착해 활동하고 고위경영진보다 냉정하게 대처했던 그들의 능력을 높이 산 것이다. 하지만 반도체 메모리 칩 사업을 유지하는 것이 개인적으로 유리한 다른 중간관리자들은 싸움을 해서라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그로브가 메모리 칩 사업을 없애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먼저 오리건 주에 있던 마지막 반도체 메모리 칩 공장을 방문해 더 이상 반도체 메모리 칩을 생산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어렵고도 중대한 결정을 이처럼 공개적으로 밝히자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영업 직원에게는 더 이상 메모리 칩을 생산하지 않겠다는 뜻을 메모리 칩 고객에게 전하라고 했다. 당시 그들은 고객의 반응을 가장 염려하고 있었다. "고객이 우리를 외면하지 않을까?" "인텔 브랜드에 대한 고객의 충성도가 크게 떨어지는 건 아닐까?" 그러나 고객은 의외로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 점에 관해 그로브는 이렇게 말했다. "고객은 현실적으로 반응했다."

이와 같이 인텔의 고위경영자들은 문화적 폐쇄성 때문에 시장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사실 인텔의 주요 고객들은 인텔이 반도체 메모리 칩 시장을 지배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미 다른 공급자를 찾고 있었다. 한 고객이 "정말 오래 걸렸군요."라고 말할 정도였다.

인텔은 어머니와도 같은 사업을 버리기로 결정하기까지 상당한 에너지를 소비하긴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구조적인 혁신에 과감히 투자하기도 했다. IBM 호환용 PC를 움직일 마이크로프로세서 사업에 박차를 가했던 것이다. 얼마 있지 않아 마이크로 프로세서 매출액은 반도체 메모리 칩의 역대 최고 매출액 수준을 넘어섰다.

그로브는 다음과 같이 낙관적인 결론을 내렸다. "1992년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성공에 힘입어 우리는 세계 최대의 반도체회사가 되었다. 메모리 칩 분야에서 우리를 궁지에 몰았던 일본 회사들보다 더 크게 성장했다. 이제 마이크로프로세서 제조업체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구축해 오히려 마이크로프로세서 이외의 제품을 홍보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영향력은 매우 커서 전체 반도체산업의 개선을 주도할 정도였다. 또 재정적인 성공으로 끝까지 버텨준 주주들에게 보답할 수 있었다. 즉, 인텔의 총주주수익률은 산업 평균 이상으로 회복되었다.

인텔의 역사가 증명하듯 문화적 폐쇄성을 극복하는 일, 즉 파괴적인 의사결정을 내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사실 이러한 과정을 겪은 기업이 수없이 많다. 그러나 시장은 기업과 매우 다르다. 시장에는 매도자와 매입자만 있을 뿐이다. 시장은 감정이 없기 때문에 기업보다 훨씬 거칠고 무자비하며 가혹하다. 또 전혀 후회나 망설임이 없다. 파괴하고도 연민을 느끼지 않는다. 담담히 파괴 행위를 조장할 뿐이다. 이는 어떤 기업도 쉽게 따르기 힘든 수준이다.

『창조적 파괴』(리처드 포스터 외 지음 / 21세기북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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