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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 없는 거리 - 김남석
내가 재직하고 있는 학교 주변에는 꽤 번화한 유흥가가 자리 잡고 있다. 이 거리에 밤이 찾아오면 상점 간판에 하나둘 불이 켜지고, 각처에서 몰려든 젊은이들은 화려한 간판의 유혹을 따라 어디론가 흩어져 간다. 그래서 간판들은 점점 거대해지고 점점 화려해지려 했다. 하지만 그 어떤 간판도, 다른 간판과의 조화나 주변 경관에 대해서는 신경 쓰려 하지 않았다. 오직 간판에게 필요한 것은 더욱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일뿐이라고 말하려는 듯, 무작정 커져가기만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몇몇 도시들은 간판 크기를 줄이는 운동을 펼쳐가기 시작했다. 과거의 간판이 크고 둔탁하고 주변 환경을 돌보지 않는 것이었다면, 이제부터의 간판은 작고 단출하고 무엇보다 주변과 어울리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 이 운동의 취지이다. 그 결과 직사각형의 무겁고 요란한 느낌을 주었던 간판은, 글자의 형해만 남은 간결하고 소박한 간판으로 하나둘씩 바뀌어갔다.
최근 부산도 이러한 운동에 동참하고 있는 것 같다. 어느 날 학교를 나서다 보니 기존의 간판들이 철거되고, 대신 그 자리에 새로운 ‘글씨 간판’이 들어서고 있었다. 하지만 간판만 바꾼다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그 다음날 보니 간판을 떼어낸 자리에 눌러 붙어 있던 해묵은 먼지와 아무렇게나 박힌 못 자국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변색된 건물 색깔로 인해, 예상치 못했던 흉물스러운 풍경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간판을 바꿔 달고 난 이후, 건물을 단장해야 하는 또 다른 과제를 떠안은 셈이었다.

그러나 달라졌다. ‘나’의 건물이고, ‘나’의 간판이지만, ‘나’의 거리는 아니니, ‘내’ 마음대로 해도 무방하되, ‘당신’들의 거리는 ‘나’의 소관이 아니라는 의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거리에 휴지를 버리는 대신 화분을 가져다 두기 시작했고, 누가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건물을 아름답고 깨끗하게 꾸미는 일이 소중하다는 의식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비록 ‘나’의 것일지라도, ‘남’의 것과 조화를 이룰 때, 그리고 ‘우리’의 것을 ‘나’의 것인 양 돌볼 때, ‘나’의 것도 진정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믿음이 퍼져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윤동주의 시 중에 『간판 없는 거리』라는 시가 있다. 낯선 도시를 방문한 시인이 간판 없는 풍경을 바라보며 겪게 되는 생소함을 노래한 시인데, 이 시에서 흥미로운 것은 알록달록한 간판 대신 ‘자애로운 헌 와사등’을 걸자는 시인의 제안이다. 그러면 흩어졌던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사람들이 사는 거리라면 모름지기, 사람들의 마음을 불러 모을 수 있는 ‘따뜻한 등불’이 필요하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우리의 거리를 바꾸는 일도 이와 같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지금 윤동주가 제안한 ‘마음의 구심점’을 달아야 할 때인 것 같다. 그래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만들어 갈 거리는, 윤동주가 말한 따뜻한 거리,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는 거리여야 한다. 간판을 바꾸어 다는 일은 그 첫 걸음일 것이다. ‘내 것’을 마음대로 치장하고 싶은 마음을 줄이고, 주변 환경과 이웃들의 마음을 헤아려 조율하는 작업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간판을 바꾸어 다는 일을 통해, 남과 함께 살아가는 연습을 다시 시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늦었지만 흐뭇한 연습이 아닐 수 없다.

정거장 플랫폼에
내렸을 때 아무도 없어,

다들 손님들뿐,
손님 같은 사람들뿐,
집집마다 간판이 없어
집 찾을 근심이 없어

빨갛게
파랗게
불붙는 문자도 없어

모퉁이마다
자애로운 헌 와사등에
불을 켜 놓고,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 사람들
다들, 어진 사람들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서로 돌아들고.

- 윤동주, 『간판 없는 거리』 전문


『간판 없는 거리』 중에서
(김남석 지음 / 푸른사상 / 245쪽 / 13,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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