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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음성 - 박목월
나의 경험에 미루어 보면 일생 중에서 감정적인 동요가 극심하고 불안정한 시기는 10대 후반기와 30대 후반기였다. 10대 후반기는 사춘기적인 현상으로서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30대 후반기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는 6.25사변이라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30대 후반기를 보냈으며, 그와 같은 시대적인 배경이 나의 생활에 심적인 혼란과 동요를 불러일으킨 것인지도 모른다.

어떻든 나는 30대 후반기에 그야말로 어처구니없게도 애정의 갈등 속에 휘말리게 되었다. 한 여인을 사랑한 것이다.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절박하고도 괴로운 일임은 경험해 본 사람만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성 간의 사랑의 일면에는 초조나 불안이 깃들기 마련이지만, 아내를 둔 사람의 다른 여인과의 애정에는 항상 자기분열과 인격적인 파탄에서 오는 자기혐오적인 환멸의 어두운 그늘이 깔리게 된다. 또한 그것은 참을 수 없는 비참한 궁지로 자신을 몰아넣게 된다.

이런 경우, 우리들은 내면에서 속삭이는 두 가지의 음성을 듣게 된다. 하나는 육신적인 유혹의 소리요, 다른 하나는 양심의 소리다. 이 육신적인 유혹의 소리는 실로 강렬할 뿐만 아니라, 자기를 옹호할 수 있는 모든 변명을 동원한다. 그중에서도 나 자신의 경험으로 가장 감미로운 것은 ‘감정의 순수성은 사회의 윤리나 도덕보다 우위에 속한다’는 사실이었다. 말하자면 순수한 감정에 순응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본연의 길이며, 그 외의 것은 사회의 질서와 안정을 위하여 인간들이 마련한 하나의 방편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 자신 비록 아내와 자식을 두었다 하더라도 다른 여인에게 끌리는 나의 감정이 순수한 만큼 그것에 순응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며, 그렇지 못한 경우 나는 비본질적인 것에 타협하는 일이라 여겨졌다.

하지만 이와는 다른 면에서 또 하나의 음성이 속삭이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한 여인에 대한 나의 감정이 순수하다 하더라도, 나와 더불어 고락을 함께하고 나를 위하여 헌신한 아내라는 또 다른 여인에 대한 인간적인 의무와 애정, 나아가서는 그 여인에 대한 보답을 어떻게 치를 것인가, 그것을 단순하게 사회적인 책임으로 떠넘기고 자신의 방종한 감정의 분류奔流를 ‘순수하다’는 그것만으로 옹호할 수 있느냐, 또한 그것이 타협이냐, 자기 회피냐, 이와 같은 반문과 더불어 이성 간의 애정보다는 한결 높은 차원의 인간적인 애정이나 삶의 길에 대한 음성을 듣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와 같이 약한 자는 그 두 가지 음성의 틈바구니에 속에서 더욱 혼란과 자포자기적인 절망 속에 빠져들었다.

그 무렵이었다. 한 집사님의 안수를 받게 되었다. 그는 시골의 소박하기 그지없는 일을 하는 노인이었다. 그분은 나의 이마에 두 개의 손가락을 얹고 몇 마디의 기도를 드려주었다.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이었다. 전날 안수를 받던 시각쯤 무심코 찬송가 250장 ‘나 속죄함을 입은 후 한없는 기쁨을 다 측량할 수 없어서 늘 찬송합니다’를 부르다가 전신에 전류가 흐르며, 네 방구석을 펄펄 뛰며 헤매었다. 불을 받은 것이다. 그것이 자그마치 두어 시간, 전류가 멎고 안정되었을 때 나는 눈을 뜰 수 없었다. 눈을 감고 한 달을 보냈다.

지금도 나는 그때의 경험을 설명할 도리가 없다. 만일 안수를 받는 당장에 그와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면 일종의 최면술이라 우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24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며, 결코 그것은 최면술이 아니다. 굳이 설명한다면 ‘기도의 능력’일 것이다.

불을 받은 후 나의 감정은 완전히 재가 되었다. 또한 눈을 감고 한 달을 보내는 동안, 나는 육신의 소리도 양심의 소리도 아닌 제3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 사랑하라!

하지만 제3의 음성이 속삭여주는 사랑의 의미는 육신의 정열에서 솟아나는 것도, 윤리적인 판단에서 빚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한결 높은 차원의 사랑을 뜻하는 것이었다.

너그럽고 편안하면서도 생기에 차 있는 것으로, 나의 심적 표현을 빌리면 ‘눈물 같은 사랑’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나의 경우는 ‘불을 받는다’는 특수한 경험을 통해 듣게 된 음성이지만, 요는 선, 악이나 영, 육이라는 구분을 초월한 ‘절대의 음성’ - 그것이야말로 신앙을 통해 우리들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생명의 음성’일 수 있다.


- 『평생을 나는 서서 살았다』 중에서
( 박목월 지음 / 문학사상사 / 370쪽 / 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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