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1 경제포털
뉴스  ·  증권  ·  부동산  ·  금융  ·  자동차  ·  창업  ·  교육  ·  세무  ·  헬스  ·  BOOK  ·  블로그   
등록예정 2022년 11월 등록예정 도서요약
북다이제스트
        
아이디/패스워드 찾기
회원가입
INFO BOOK
어머니 김정현과 그 둘레 - 서정주(시인)
어떤 어머니들을 보면 우리 선조 단군의 어머님이 암콤 출신이었다는 것을 곧 연상하게 되지만, 내 어머니 김정현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암콤보다는, 그 곰과 함께 마늘과 쑥을 먹고 사람 되는 연습을 하다가 그만 중도에서 작파해버린 암호랑이 - 그게 만일 잘 참아 성공을 했더라면 - 같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생긴다. 딴 어머니들은 어린 아들이나 딸을 곧잘 업기도 하고 안기도 하지만 내 어머니는 어려서도 나를 안거나 업어 주었던 기억이 내겐 없다. 어려서 밤에 부모 사이에 끼여 잘 때에도 가끔 그 겨드랑이에 나를 안은 이는 오히려 아버지였지 어머니가 아니었다.

내 아버지가 ‘박가분’ 냄새를 풍기던 예쁘장한 여자 하나를 슬그머니 데리고 들어온 일이 있었을 때에도 어머니가 취한 행동은 보통 본처들이 이런 경우에 취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 소실댁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늘어지거나, 남편에게 대들거나, 친정으로 달아나거나 하는 짓을 되풀이하지 않았을 뿐더러, 어머니는 이 원수와 나란히 곧잘 그네의 부엌 아궁이 앞에서까지 형제처럼 어깨를 맞대고 앉아 있었다. 김치를 썰거나 생선 같은 걸 다루려 아궁이 앞을 잠시 떠날 때에는 그 손의 부지깽이를 이 속없는 여자한테 넘겨주며 “불 좀 보고 있거라” 하기도 했다. 일종의 여자 처용이 다 되어 있었던 것일까. 그러나, 어머니의 얼굴과 태도에서 이때 풍기고 있던 것은 그런 처용의 노래나 춤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소실의 방에서 나오던 아버지의 두 눈이 어쩌다가 어머니의 그것과 마주칠 때 보면 어머니는 늘 그저 외면만 했지만, 아버지의 얼굴은 점점 더 비굴한 하인의 그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소실댁이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어머니가 움직이는 손가락의 하나하나, 그 눈치의 어느 조그만 것에서까지도 이 불쌍한 여자는 영 해방될 길을 찾지 못하고 늘 거기 매달려 안절부절못하고만 있었다. 나는 그 엉뚱한 여자가 내 어머니를 이겨서 나와 어머니의 방을 차지하고 대들면 어쩌나 그게 처음엔 적지 아니 걱정이었던 건데, 그걸 꼼짝 못 하게 만들었으니 어머니는 참 상당해 보였다. 드디어, 두 달쯤 뒤의 어느 겨울날 아침 소실댁은 “성님, 나 그만 우리 친정으로 가야겠어라우.” 하고 자기 친형님한테나 뇌까리듯 뇌까리고는 그만 내 어머니한테 항복하고 물러나 버렸다.

그러나, 인제 와 생각이지만 그때 어머니는 속으로 참 애 많이 쓰셨을 것이다. 우리 남자들이라면 하늘 밑에서 어느 힘센 장사도 당해낼 수 없을 그 모욕과 파탄을 무엇으로 어떻게 견디며 가족들을 고스란히 건져내 이끌고 오셨는지, 이건 정말 신비한 힘이다.

그리고 내가 중학교 때의 일이다. 나는 서울에서 장티푸스 병에 걸려, 우리 집이 있던 부안군 줄포라는 곳으로 실려 와서 다시 이 줄포 마을에서 외따로 떨어진 전염병자 가두는 집에 갇히게 되었다. 이때만 해도 이 염병은 걸리면 죽는 수가 사는 수보다 훨씬 많던 때여서, 이 병에 걸린 사람하고 같이 한 방에서 사는 것은, 같이 죽을 각오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내 어머니는 큰아들인 나와 운명을 같이하기로 하고 이곳까지 따라와 있었다. 한 주일에 한 번쯤 나올까 말까 한 일본인 의사의 치료를 받고 지내는 동안, 병은 점점 더하고 의사도 그만 단념하는 눈치여서, 상당히 감상적이었던 내 아버지는 마침내 내 상여 만들 것까지를 당부하고 집에서 어디론가 나가 버리고 말았다. 그걸 기적같이 고쳐 내서 다시 나를 살게 한 건 순전히 내 어머니의 슬기와 정성과 기도의 덕이다.

의사의 약이 별 효력이 없는 걸 알자, 어머니는 이 염병엔 열이 제일 어려운 것임을 요량하고 밤이나 낮이나 빈틈없이 내 곁에 지켜 앉아 열심히 연달아서 얼음베개를 갈아 베어 주고 얼음 물수건으로 이마를 덮는 일을 되풀이하며, 늘 그네의 하늘 속 마지막 스승 천지신명께 빌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지나친 열로 어떤 때는 날카로운 낫을 들고 덤비는 흉측한 마귀한테 붙잡혀 두 눈을 뒤집고 악을 썼었다. 이럴 때 옆에 잠시라도 누가 없었더라면 나는 그만 저승으로 숨을 거두어 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 옆엔 다행히도 의학은 모르지만 열은 어떻든 이어 식히고 있어야 할 것이라는 이해 하나로, 이 일을 계속하기에 빈틈이 없던 내 어머니가 있었다. 내 열의 막바지를 타고 늘 나타났던 죽음은 이 어머니의 끈질긴 방비를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마침내 고개 숙이고 말았다.

어머니는 별만 겨우 깨 있는 새벽이면, 그 외딴집 뒤 언덕에 그네의 맑은 정화수 사발을 괴어 바치곤, 데려가겠거든 자기를 대신 데려가 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올렸고, 이 기도는 그네에게 밤낮으로 거의 늘 눈뜬 채 사는 힘을 빚어 가지게 했으며, 이 힘이 내 열의 마지막 고비를 늘 막아내 나를 살린 것이다.

그러니 이분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아무래도 곰보다는 역시 그 곰하고 한동안 겨루던 호랑이의 냄새가 난다고 할밖에.


- 『육자배기 가락에 타는 진달래』 중에서
(서정주 지음 / 삶과꿈 / 348쪽 / 9,800원)
번호 | 제목 | 날짜
14 언제 노인이 되는가 - 성낙향 2012년 07월 31일
13 지리산, 나는 그곳에서 천천히 죽고 싶었다 - 이기웅(한의사,... 2012년 06월 26일
12 신의 방정식 - 함성호(시인이자 건축가) 2012년 05월 30일
11 어머니 김정현과 그 둘레 - 서정주(시인) 2012년 04월 27일
10 작은 곱사등이 - 평론가 이태동 2012년 03월 27일
9 제3의 음성 - 박목월 2012년 02월 29일
8 안항雁行 뒤에서 - 나희덕, 장석남 2012년 01월 26일
7 간판 없는 거리 - 김남석 2011년 12월 23일
6 존재의 테이블 - 시인 나희덕 2011년 12월 09일
5 인간의 한계 - 시인 김현승 2011년 12월 09일
단체회원가입안내
독서퀴즈이벤트
나도작가 신청안내
무료체험
1분독서영상
한국독서능력검정 신청
모바일 북다이제스트 이용안내

인재채용 | 광고안내 | 구독신청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용약관 | 서비스문의 이용문의:mkmaster@mk.co.kr
회원문의:usrmaster@mk.co.kr
매경닷컴은 회원의 허락없이 개인정보를 수집, 공개, 유출을 하지 않으며 회원정보의 보호를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