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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나는 그곳에서 천천히 죽고 싶었다 - 이기웅(한의사, 기고가)
30대의 어느 한 시절, 나는 어둠과 만나기 위해서 야간 산행을 떠났다. 날마다 일과가 끝나면 등산화로 갈아 신고 어둠에 잠긴 산을 터벅터벅 걸어 올라갔다. 숲과 새들이 어둠을 덮고 잠든 시각, 나 홀로 산에 끌리고 어둠에 취해 밤의 능선을 걷고 적막 속에 뒹굴었다. 산에서 만나는 어둠은 엄마의 자궁처럼 아늑했다.

문명이란 어둠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도시는 낮처럼 밝고 사람들은 어둠을 거부한다. 사람이 만들어낸 불빛에 익숙해진 나머지 우리는 세상의 반을 차지하는 어둠을 잊어버렸다. 어둠은 그저 어둠일 뿐이다. 하지만 산에 들어가 그 막막한 어둠 한가운데 서 있다 보면 거기, 또 다른 만남의 축제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낮 동안 빛의 소음에 시달리며 ‘밝음’ 속에 가려져 있던 산과 숲이 어둠과 함께 하나둘씩 깨어난다. 나무와 바위와 풀들이 제각각 빛을 벗고 하나로 합쳐지는 그 장엄한 풍경 속에서 나도 어느새 숲의 가족이 되고 마침내 서로 동등한 존재가 된다. 그 아름답고 신비로운 체험에 중독되어 나는 2년 반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밤의 산을 찾았다.

낮의 산을 보는 것만으로는 산을 모두 만날 수 없듯이 우리의 시선이 ‘삶’에만 고정된다면 죽음에의 인식을 접하기 어렵다. 하지만 삶의 비밀에 좀 더 접근하려면 삶과 죽음을 아울러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 필요하다. 우리는 모두 ‘끝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는, 너무도 분명하고 확정적인 진실은 바로 ‘끝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만날 수 있을 때 우리의 삶은 달라진다.

20대 시절 나는 목포에서 제주로 향하는 밤배에 올랐다. 홀로 갑판에 남아서 깜깜한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하늘이 바다가 되고 바다가 하늘이 되는 그 시각, 갑자기 밤의 어둠보다 짙은 먹장구름이 몰려오는가 싶더니 광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잔잔하던 파도가 거칠게 일어나 금방이라도 배를 집어삼킬 듯이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이던 그 순간, 내 안에서 아주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어도 좋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어둠과 죽음에 대한 인식과 마주했다. 존재를 던진다는 것, 존재를 모두 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몸으로 전해져오는 순간이었다. 그때의 죽음은 지극히 순간적이며 관념적인 체험이었다.

그러나 30대, 40대를 거치면서 죽음에 대한 인식은 점점 더 구체화되고 확실해졌다. 모두들 생을 살다 가긴 매일반이지만 죽음을 인식하고 사는 것과 그렇지 않은 삶은 마찬가지가 아니다. 끝을 알고 걷는 여행자에게는 길가의 풀과 벌레, 모든 존재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소중하게 다가온다. 그럴 때 여행자는 과거와 미래를 망각한 채 오로지 현재의 이 순간을 살게 된다. 온 존재를 다 건다는 것은 순간을 꽉 차게 산다는 의미이고, 삶은 그래서 더욱 황홀해진다. 나는 깨어 있는 모든 순간을 만남과 감동으로 가득 채우고 싶어졌다. 만남의 과정이 한 장씩 넘겨질 때마다 나는 감동을 느꼈고, 그런 떨림과 울림으로 또 다른 만남을 꿈꿀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진짜와의 만남’은 멀게만 느껴졌다. 철이 들고부터 나는 눈에 보이지 않고 정답도 없는 것을 찾아 헤맸다. 세상은 갈수록 속을 가리고 겉만 치장한 채 끝없는 욕망으로 치달았고, 그런 세상이 진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수록 나는 어딘가에 있을 진짜를 찾고 싶었다. 이 세상이 진짜가 아닌 까닭에 누구를 만나도 공허한 메아리만 울려 퍼질 뿐이었다. 그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 고통에 밀려 히말라야를 찾았고, 산을 오를 때마다 바위에 머리를 부딪쳐 깨부수는 한이 있더라도 진짜를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답을 찾을 수 없었고 생의 절반을 넘어선 어느 날, 마침내 한계에 도달했다. 지치고 황폐해진 나는 이제 어떻게든 끝을 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 생각으로 찾아간 곳이 바로 지리산 깊은 골짜기의 허름한 움막이다. 나는 거기서 가만히 누워 굶기로 했다. 육신의 모든 에너지가 바닥날 때까지 꼼짝 않고 누워 생명이 꺼져가는 순간순간을 고스란히 느끼고 싶었다. 그것은 곧 죽음을 맞이한다는 의미였다. 나는 그곳에서 천천히 죽고 싶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지리산 깊은 오두막에 짙은 어둠이 내렸다. 나는 토굴 같은 움막 한가운데 드러누워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생생하게 무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땅을 파고 무덤 속으로 들어가 죽음을 기다린다. 이제 이 행성에서의 모든 여정을 마치고 이별을 해야 하는 시간이다. 시간은 추억을 만나 더디게 흐른다. 지리산에서의 무덤 상상은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자정을 넘어 밤의 역사가 시작되는 시각, 나는 생각 속에 떠오르는 모든 만남들을 가만히 바라본다. 사람들이 미소가 하나하나 스쳐 지나간다. 그들 모두에게 ‘안녕’이라고 인사한다. 그렇게 절실하고 온전한 인사를 해본 적이 있던가. 나는 정말 이 세상과 헤어지는 중이었다. 그러자 나의 지난 여정 속에서 만났던 그 모든 것들이 너무도 고맙고 사랑스럽게 다가왔다. 그런 종류의 사랑은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어느 날 밤, 말할 수 없이 행복한 감정이 밀려왔다. 진짜를 만나고 싶어했던 그 치열한 의식 속에 행복과 평화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제야 비로소 머리가 아닌 가슴이 세상을 만나러 나온 느낌이었다. 나는 무덤 속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래, 포기할 수 없다. 나는 진짜를 향한 항해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30대가 끝나고 40대로 접어들던 그해, 나는 지리산에서 내면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리고 다시 여행자가 되어 또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 『소울 플레이스』 중에서
(이기웅 외 지음 / 강 / 252쪽 /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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