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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항雁行 뒤에서 - 나희덕, 장석남
마흔을 넘기면서부터는 슬픔뿐만 아니라
웃음이 지닌 힘에 대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시인은 기쁨보다는 슬픔과 가까운 존재라고 생각해 왔지만,
이제는 그런 강박관념마저 내려놓고 싶다고 할까요.
웃음이란 단순한 가벼움이 아니라 많은 것을 비워 낸 뒤에
싹트는 표정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 광주에서 나희덕


눈이 내리는군요. 이월이니 서양식 시간의 이름으로는 아직 봄이라 부르기 어려우나 우리 식으로는 입춘이 지났으니 절기상 봄입니다. 그럼에도 이리 큰 눈이 오니 아주아주 좋군요. 처음엔 금방 지나가려니 했는데 계속 퍼붓고 있으니 참 좋습니다. 오랜만에 다니러 온 반가운 고모가 예상을 깨고 하룻밤 묵겠다고 어머니의 일상 옷을 얻어 갈아입는 풍경의 그것이랄까요…….

눈이 오면 저는 아주아주 좋아요. 왜 좋은지 곰곰이 따져 보지 않았지만 아마도 그 고립감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눈이 오면 모든 움직임들은 뜸해지고 고요해지지만 설원의 단순함 위로 마음은 해방을 맞습니다. 마음의 해방. 거추장스러운 것 없이 멀리멀리 달아나는 눈길은 마음을 시력이 닿지 않는 저 먼 데로 자꾸만 자꾸만 데리고 가잖아요.

설원을 보면 우선 서산대사의 시도 생각나고 그걸 처연한 필치로 옮겨 남긴 백범 선생 유묵도 생각나고 추사의 <세한도>도 생각나고 이청준의 <눈길>도 생각나고 곽재구의 <사평역에서>도 생각나고 천승세의 <혜자의 눈꽃>도 생각나고 김광균의 <설야>도 생각납니다. 상허의 <눈 온 아침>도 생각납니다. 사연도 가지각색, 의미와 해석도 가지각색, 이미지도 각각이지만 단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 저변에 고여 흐르는 침묵 혹은 고요!

저는 고요에 색이 있다면 그 눈의 빛깔이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한답니다. 거기엔 웃음을 쏟아도 좋고 울음을 쏟아도 좋습니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목을 뒤로 젖히고는 허리가 끊어져라 웃어 대는 어린아이의 천상의 웃음소리가 설원의 고요 속에서 달려옵니다. 또 한편으로는 아이의 그러한 웃음을 다시는 들을 수 없게 된 어느 젊은 엄마의 헤아릴 길 없는, 가슴 저미는 울음 같은 것도 있어서 백 년 넘은 소나무의 가지를 꺾어 놓기도 합니다. 그 고요함이 저는 좋습니다.

이 푸근한 큰 눈은 아마도 오는 봄을 재촉하는 눈일 겁니다. 지나가는 겨우살이 속에 혹 앙금 같은 것이 있다면 이 설원에 모두 쏟아 놓으라는 것으로 해석해 보려 합니다.

문득 사나흘 전 산책길에서 만난 기러기 떼가 생각납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만나는 대규모의 안항 풍경이었습니다. 사오십 마리는 족히 넘을 듯한 무리가 삼각 편대로 까마득한 동천(冬天)을 날아가는 풍경은 참으로 장관이었습니다. 그리고 경건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감탄사처럼 앞서 걷던 작가 K를 불러 세웠더니 그자도 그만 그 자리에 얼어붙듯 섰습니다. 그리고 그 앞을 걷던 J와 O를 불러 손가락 하나를 펴서 하늘을 가리켰습니다. 모두 말없이 기러기 떼가 북쪽 하늘 속으로 지워질 때까지 지켜보았습니다. 쉬 잊히지 않을 풍경이었습니다. 그 풍경 하나로도 이번 강원도의 겨우살이는 대성공입니다.

그때 잠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렇게 기러기 떼가 가면 겨울은 가는 것이지. 저는 동시에 우리들의 안항을 생각했던 듯싶습니다. 비슷한 행로를 걷는 도반들 말입니다. 저는 그 무리의 맨 뒤쪽에서 겨우겨우 쫓아가고 있겠지요. 생각만으로도 속된 마음이 조금 맑아진 듯했습니다.

마음으로 기대던 또 한 분의 선생님이 지금 암과 싸우고 계십니다. 우리들의 맨 앞을 날던 기러기의 날개가 무겁습니다. 그분은 제게 맨 앞쪽 하늘을 나는 기러기이거나 이렇게 덕성스럽게 눈 내린 날의 설원과 같은 분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슬퍼하지는 말자고 다짐합니다. 북쪽으로 아름답게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한참 서서 바라본 참이니까요. 보내 준 편지 중 ‘울음 뒤의 웃음’의 의미를 저는 이런 식으로 변주해 생각해 봅니다.

곧 저도 하산하게 됩니다. 그냥 눌러 있고 싶은 맘 굴뚝같으나……
눈이 옵니다.

- 인제에서 장석남


『더 레터』 중에서
(나희덕, 장석남 지음 / 좋은생각 / 172쪽 / 11,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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