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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사랑, 사랑의 길
새벽 4시, 검푸른 밤하늘에 새하얀 눈썹달이 돋을새김된 한계령에 서자 희뿌연 입김과 함께 자동적으로 입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저 산은 내게…” <한계령>의 노래 가사에서 ‘저 산’은 그 앞에 선 이에게 ‘우지 마라’, ‘잊으라’, ‘내려가라’고 한다. 그러면 노래의 화자는 ‘그러나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라며 강다짐인 듯 저항인 듯 대거리를 한다. 차가운 시내(寒溪), 그 이름부터 서늘하고 쓸쓸한 한계령에서 왜 울어야 하는지, 무엇을 잊어야 하는지, 어찌 내려갈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일단 ‘저 산’에 올라 내 마음의 지도를 톺아보아야 한다. 때로 산은 내려올 것을 알면서도 오르는, 어쩌면 내려오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올라야 하는 그 무엇이다. 왜 사는지, 무엇이 삶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때로 구차하고 눈물겨울지라도 어떻게든 살아내야 하는 것처럼.

이우학교 아이들과 학부모 도합 24명이 백두대간 완주를 목표로 오른 산행길. 그중 백두대간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 설악산행은 과히 마지막 하이라이트라 할 만했다. 소요시간이 15시간 이상 되는 설악산 종주를 어찌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특히 중청대피소에서 마등령을 잇는 공룡능선은 5킬로미터 거리에 4-5시간이 소요될 만큼 악명이 높은 곳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전부 당일치기 무박산행을 고집했고, 나와 다른 엄마들 몇 명, 그리고 아빠 한 분은 일단 중청대피소 숙박을 예약했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결의를 다지고 뛴다면 무박 종주도 불가능하진 않을 테지만 아름다운 설악을 그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넘고 싶진 않았다.

새벽 4시의 어둠 속에서 무박 조가 먼저 한계령을 출발할 때, 처음으로 아들아이와 떨어지게 된 나는 안절부절못하고 아이의 주변을 맴돌며 같은 잔소리를 끊임없이 반복했다. 낙석 조심해라, 한눈팔지 마라, 사진은 쉴 때만 찍어라…… 근심 걱정이 차고 넘쳐 금방이라도 따라 나설 태세인데 아이는 “걱정 마!”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떠나간다. 여전히 아이를 묶은 끈을 놓지 못해 조바심치는 못난 어미에게 ‘저 산’이 쓸데없는 미련으로 ‘우지 마라’고, 그를 정말 사랑한다면 그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그가 나이고 내가 그였던 과거 따윈 ‘잊으라’고 꾸지람한다.

해가 뜬 뒤, 우리도 한계령을 출발했다. 과연 산을 잘 탄다는 게 무얼까? 최소한의 시간에 최대한의 거리를 가는 것? 『마음의 작동법』의 저자인 에드워드 데시는 “장미꽃 향기를 맡고, 퍼즐 조각을 맞추고, 나뭇잎 사이에서 춤추는 햇살을 바라보고, 산 정상에 올라 희열을 느끼는 모든 일들이 완벽하게 가치 있는 경험이 아닐까?” 하고 묻는다. 빨리 가든 늦게 가든 뛰어가든 기어가든, 우리 모두가 끝끝내 닿을 곳은 다만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는 그곳인 것을…….

눈부신 가을볕 아래 보랏빛 투구꽃의 사열을 받으며 쉬엄쉬엄 걷다 보니 어느덧 중청대피소에 닿았다. 해는 뉘엿뉘엿 져 가는데 설악동에 도착하면 연락한다던 아이들이 보낸 문자는 나를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게 했다. <공룡능선은 대야산을 3-4개쯤 붙여놓은 것 같더라!> 아, 대야산! 지난해 산행에서 정상에 이르는 50미터의 수직 절벽을 오르다가 그야말로 죽음의 예감과 공포를 생생하게 맛본 마魔의 산! 그때부터 내 안의 두려움과 불안이 어서 빨리 산에서 ‘내려가라!’고 아우성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일단 산에 들어오면 도망칠 수가 없다. 이 고립과 한계를 기꺼이 흠뻑 즐기는 수밖에 없다. 그조차 산의 품에 깊이 안긴 이의 운명이자 축복이라 여기며.

그런데 다음 날 각오를 단단히 하고 오른 공룡능선에서 나는 다시 한 번 새롭게 깨달았다. 두려움이란 결국 스스로가 오롯이 지어낸 마음의 감옥임을. 공룡능선은 잠을 설치며 걱정했던 것만큼 위험하지 않았고, 생각했던 것만큼 한정 없지도 않았다. 오히려 곳곳에 눈길을 사로잡는 기기묘묘한 바위와 절경에 힘들거나 지루해할 틈이 없었다. 하지만 어제 아이들이 그토록 괴로워했던 이유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들이 공룡능선에 닿은 것은 산행을 시작한 지 8시간이 넘었을 때였으니 기운이 빠진 상태에서 거듭해 불쑥불쑥 나타나는 바위 봉우리가 끝없는 고통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산이라도 힘에 부치도록 너무 빨리 달리면 그 아름다움을 충분히 즐길 수 없는 것이다.

공룡의 등날처럼 뾰족뾰족한 바위를 몇 구비나 넘어 마등령에 도착했을 때까지는 모두들 쌩쌩했다. 그런데 마등령에서 비선대까지의 내리막길이 예상치 못했던 또 다른 복병이었다. 3시간을 불규칙한 너덜로 내리꽂히다 보니 허벅지에서 무릎을 지나 종아리까지 아프지 않은 데가 없었다. 하지만 이 길을 먼저 지난 아이들을 생각하면 기특하고도 안쓰러워 도무지 엄살을 떨 수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아들아이를 만나 그때의 마음을 전했을 때 아이들 역시 그 길을 지나며 엄마들을 걱정했다고 한다. 당장 자기 몸이 고되고 힘든 것보다 앞서 간 누군가와 뒤따라올 누군가를 걱정하며 안타까워하는, 그것이 바로 길의 사랑이었다. 우리는 설악에서 바위처럼 크고 단단한 사랑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 『괜찮다, 우리는 꽃필 수 있다』 중에서
(김별아 지음 / 해냄 / 288쪽 / 13,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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