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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그대로 두겠습니다 - 유하
그대를 그리워하며, 한나절 들판에 앉아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바라본 적이 있습니다. 갈대들은 바람에 온 머리채 다 닳도록 몸을 맡기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주장하지도 내세우지도 않고, 오로지 침묵으로 끊임없이 흔들리는 갈대들…… 그것만이 갈대가 보여주는 삶의 전부였지요.

갈대들은 바람과 함께 갈 수 있는 데까지만 느낌의 육체를 던졌다가, 이내 바람의 손을 놓고 다시 몸을 거두곤 했습니다. 그들은 바람의 자유로운 발길을 질투하지도 않았고, 광활한 세상의 저편을 순식간에 소유해버릴 듯 날아가는 바람의 욕망 어린 눈동자를 부러워하지도 않는 것 같았습니다. 다만 자신의 한정된 움직임의 운명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 그저 흔들리고 흔들릴 뿐이었습니다. 나는 그 반복되는 흔들림을 명상하듯 찬찬히 들여다보았습니다. 그 흔들림 속엔 그 어떤 마음의 변형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요. 아니, 그들은 세상을 향한 자신의 온갖 감정들을 오로지 흔들림 하나로 육체화시켜놓고 있었습니다. 그 갈대들의 몸짓을 통해 난 진정한 그리움의 향기가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요. 그동안 나는 얼마나 나를 내세웠던가요. 당신을 그리워한다고, 얼마나 수없이 외쳤던가요. 그리움의 마음을 얼마나 과시했던가요. 그대를 알고 난 이후로 오래도록 아파왔지만, 말없음의 몸짓으로 등뼈 끊어질 듯 흔들리다 삶의 저편으로 소멸해가는 갈대 앞에서, 그립다 말해버린 내 그리움은 이미 그리움이 아니었습니다.

그대를 만난 뒤로 자연의 곳곳에서 사랑을 봅니다. 자연 속엔 사람을 진실로 이롭게 하는 수많은 사랑법이 수없이 빛나고 있습니다. 저물녘 산비둘기를 기다리는 극진한 대숲의 떨림 속에서, 바닷물의 마음을 온 가슴으로 맞이하기 위해 자신을 무심하게 비운 갯벌 위에서 나는 지고한 사랑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저 갈대숲을 가만히 흔들며 흘러가는 시냇물, 거기에도 내가 꿈꾸는 사랑이 있습니다.

물은 세상 만물 어느 것과도 다투지 않습니다. 다만 비켜 흐를 뿐입니다. 물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낮게 흐릅니다. 그대 눈물 고인 눈을 보며 물을 닮은 사랑을 생각했습니다. 소유욕과 증오와 그리움, 그것들을 물처럼 그윽하게 비켜가는 사랑, 그리고 물처럼 그대 앞에서 한없이 낮아지는 사랑 말입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지고한 높이의 비구름이 되어 땅을 기름지게 하는 물처럼 내 사랑 얼마나 그대를 이롭게 할 수 있을까요.

그대를 처음 만났을 때가 지친 매미 울음이 흐르던 늦여름이었던가요. 그리고 첫 만남의 잔잔한 떨림이 가시기도 전에, 노란 은행잎의 물결이 잔잔히 흐르는 가을이 찾아왔지요. 그대의 눈빛 때문에, 내겐 문득 생애 첫 가을이었어요. 그대는 노란 은행잎의 눈부심으로 마침내 나를 가두었습니다. 그대 얼굴이 물들지 않은 은행잎은 세상 천지에 없었으니까요. 온 대지 위의 은행잎들이 온통 그대 얼굴로 물들어갈 무렵, 초겨울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지요.

앙상한 가지의 은행나무를 보며, 은행잎을 소유하지 않고 떠나보낸 은행나무의 사랑을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대를 사랑했기에 그대를 영원히 소유하고 싶었고, 소유하고 싶었기에 그대를 증오했었습니다. 그 은행나무숲에서 그런 내 마음이 얼마나 앙상하게 느껴지던지. 나무는 나뭇잎을 소유하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랑이 말라죽지 않듯, 하여 새봄의 푸르름으로 다시 만나듯.

그대를 사랑한 이후로 오래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그대가 주는 것이 아닌, 철저히 내 마음속에서 스며나오는 고통이었습니다. 그대를 내 삶의 습관과 사고의 틀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인위적 욕망이, 가슴에 사랑이란 이름으로 가득 찼었습니다. 그 가득 찬 인위적 욕망들이 한동안 나를 맹목적이게 했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욕망 때문에 정작 그대를 보지 못했었지요. 그러나 결국 그대라는 존재의 힘이, 나로 하여금 진정한 눈을 뜨게 했습니다. 그대는 그 인위의 욕망들을 한나절 소나기이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텅 빈 가슴의 눈으로 바라보는 자연의 숲 속엔, 만물 ‘그대로’의 숲 속엔, 물 한 방울 바람 한 점 사랑의 이치 아닌 게 없습니다. 아, 그대는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나를 오래 아프게 했지만, 마침내 그 아름다움으로 나를 구원했습니다.

이제,
그대를
그대로 두겠습니다.

그대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에 대해 정의를
내려야만 하는 끊임없는 요청 앞에 자신이 내리는
정의의 불확실성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모든 형용사가
배제된,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받아들이는 지혜를
꿈꾼다. -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중


- 『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 중에서
(유하 지음 / 문학동네 / 308쪽 /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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