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사랑을 처음 만났을 때 몸이 마비되는 전율, 어느 역 스크린도어에서 에밀리 디킨슨이 쓴 <사랑은 생명 이전>이라는 단 네 줄짜리 시를 우연히 보고 전 그만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사랑은 - 생명 이전이다
죽음 - 이후이다
천지창조의 근원이며, 그리고
지구의 해석자 -

Love - is anterior to Life
Posterior - to Death
Initial of Creation, and
The Exponent of Earth -

단 네 줄로 이루어진 이 시를 읽고 나자 찌르르한 느낌이 목을 타고 지나갔습니다. 사랑에 관한 이 짧은 시에서 ‘사랑’이란 단어는 단 한 번 등장합니다. 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사랑을 미사여구로 장식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번 강조하거나 신비주의로 포장해 모호하게 표현하지도 않습니다. 이처럼 최소 단어를 가지고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다니 놀랍기만 합니다.

어쩌면 사랑은 우리에게 흔해져버린 단어입니다. 하지만 시인에겐 사랑이란 단어가 너무도 절실합니다. ‘사랑은 - 생명 이전이다’라는 문장에 모든 게 들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생명, 즉 목숨이 가장 본질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숨이 붙어 있는 다음에야 사랑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시인은 목숨보다 사랑이 먼저라고 말합니다. 사랑이 없다면 살아 있어봐야 산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시인의 직관은 무섭기까지 합니다. 삶 속에서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목숨을 던져버리는 사태가 끊이질 않으니까요.

두 번째 줄에서 시인은 왜 ‘(사랑은) 죽음 - 이후이다’라고 말했을까요? 누군가 호흡이 멈춘 이후에도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남긴 사랑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여기서 그 놀라운 이치를 전합니다. 사랑을 가진 사람은 죽은 후에도 다른 이의 마음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천지창조의 근원이며, 그리고 지구의 해석자’라는 문장은 소박하지만 모든 걸 설명합니다. 모든 생명체는 사랑의 행위를 통해 새 생명을 탄생시킵니다. 나아가 지구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에 사랑이라는 프리즘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미국의 여류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불립니다. 사진 속 시인의 모습은 깔끔하고 단정합니다. 그녀의 시처럼 말이죠. 청교도 가정에서 자란 그녀는 평생 독신으로 살며 외출도 않고 집 안에서 은둔했습니다. 대중이 알아주지 않았지만 그녀는 이처럼 천재적인 시를 남겼습니다.

그녀는 사실 타인보다 더 큰 고독, 외로움과 싸웠을 것입니다. 그 고독과 외로움이 <사랑은 생명 이전>과 같은 시를 빚어낸 조건이라니,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사랑은 생명 이전>을 다시 한 번 읽으며 그녀의 삶을 생각해봅니다. 그녀는 에밀리 브론테나 샬럿 브론테가 그랬던 것처럼 젊은 나이에 이미 타고난 감수성으로 세상을 알아버린 것이죠. 그리고 시와 사랑에 빠진 게 아닐까요?

지하철 스크린도어를 다시 봅니다. 영혼을 적시는 시의 위대함을 봅니다.

- 『사랑책』 중에서
(장상용 지음 / 21세기북스 / 244쪽 /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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