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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테토스
2층 서재에는 내가 2년 가까운 칩거 동안 꺼내 보던 책들이 주르르 꽂혀 있었다. 에픽테토스, 안젤름 그륀, 오스카 와일드 그리고 릴케. 나는 에픽테토스의 책을 꺼내 들었다. 밑줄이 여러 개 그어져 있다. 느낌표도 있고 당구장 같은 표시도 있다. 눈물 자국인지 녹차 방울인지 모를 자국도 있었다. 그것들은 종이 위에 상흔으로 남아 있었다. 덕택에 종이는 그 본질의 평평함을 잃고 쭈그러져 있었다. 화상의 흔적 같았다. 혹은 내 팔뚝에 남아 있는 동그란 폭력의 흔적들 같기도 했다.

자신의 본질과 이질적인 것은 상흔을 남긴다. 그리고 그 상흔으로 인해, 그 이질적인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아픔의 힘으로 우리는 생의 모퉁이를 돌기도 한다. 그것이 좋은 곳으로 가는 길인지 아닌지는 나는 아직도 모른다. 산에 오르던 친구는 그것을 블라인드 포인트라고 말했다. 모퉁이를 돌면 그곳에 무슨 죽음과 무슨 삶이 펼쳐질지 모르는 험악한 등정에서 산악인들은 언제나 그 블라인드 포인트를 돌아야 한다고. 그리고 초보자들에게 그것은 대개 죽음보다 더한 공포와 고통을 준다고. 거기서 이겨낸 자에게만 산은 그 정상을 허락한다고.

에픽테토스, 그리스의 절름발이 철학자. 스토아학파의 거두……. 그가 주인에게 맞아 절름발이가 되었다는 설도 있고 아니면 그냥 처음부터 불구였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그는 절름발이에 노예였다. 그런 그가 로마로 가서 당대의 최고 학파인 스토아학파의 거두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을까, 그리고 그것은 그를 얼마나 많이 성숙하게 만들었을까, 생각해본다. 에픽테토스에게서 영향 받은 안젤름 그륀의 책 <너 자신을 아프게 하지 말라>라는 책의 한 구절은 그 무렵 불현듯 내 인생을 바꾸어놓았다. 나는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을 비난하는 심술궂은 사람들을 배심원석에 앉혀 놓고 늘 피고석에 앉아 자신의 행위가 무죄라는 변명을 끝없이 늘어놓고 싶은 강박을 가지고 있다.”


나는 아직도 그날을 기억한다. 그날, 출판사 편집자 둘이 나를 방문했었다. 정원에 놓인 탁자에 앉아 시장에서 사온 향기로운 오이와 호박, 그리고 풋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며 나는 좀 취했던 거 같다.

“말이죠. 저는 이제 피고석을 떠나겠어요. 오늘부터 내 배심원들 다 해고예요!”

그들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다 알지는 못하는 것 같았지만 나를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그 말 이후에 이제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라고 말했기 때문이리라. 끝이 좋으면 대개는 좋은 것이다. 다 이해할 수도 없으니까 다 이해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 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니까.

나는 책장을 더 넘겨보았다. 동방의 성자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말에 밑줄이 세 개나 그어져 있다.

“너 자신 외에 너에게 상처 입힐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2년 전 그날처럼 에픽테토스의 책을 펼쳐 들었다. 하도 읽어서 그 페이지가 금방 드러났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우리에게 일어난 어떤 일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우리가 가지는 표상이다.”

그해 여름과 가을 겨울이 지나는 동안 안젤름 그륀과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에픽테토스는 그들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나를 치료해가고 있었다.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이 순간의 특수한 상황에 몰두하십시오. 이 사람에게, 이 도전에, 이 행동에 반응하십시오. 회피하지 마십시오. 이제 진정으로 살아야 할 때입니다. 당신이 지금 놓인 상황을 온전히 살아가십시오. 방문이 닫히고 방이 어둡다고 해도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당신 안에서 당신에게 끈덕지게 이야기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위대한 것은 갑자기 창조되지 않습니다. 시간이 걸립니다. 최선을 다하십시오. 늘 친절하십시오.”


나는 조금씩 따뜻해져 가는 집 안에 앉아 다시 한 번 그 책을 열중해서 읽었다.

-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중에서
(공지영 지음 / 해냄 / 243쪽 /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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