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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붕어의 아침
아무래도 50여 년 전 그 겨울밤의 기억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전쟁과 피난살이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무렵, 나는 단칸 셋방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고 이따금 아궁이의 연탄불이 꺼져 잉크병이 어는 일도 있었다.

그날은 더욱 그랬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방 안은 얼음장이었고 어항까지 얼어 있었다. 어제만 해도 곧잘 헤엄치던 금붕어들이 살얼음 속에 화석처럼 박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신혼부부가 살기에는 너무나도 썰렁한 방이기에 궁리 끝에 사온 금붕어였다. 수정구 모양의 작은 어항이었지만 그래도 용궁 속 다른 세상을 보고 있는 것 같아 조금은 위안이 되고 여유와 사치조차 느낄 수 있어 좋았다. 강아지에게 하듯이 이름도 지어주었다. 암수 구별을 할 줄 몰랐지만 세 마리 모두 작고 예쁜 모양을 하고 있어 미의 세 여신, 카리테스에서 이름을 따오기로 했다. 빨간 금붕어는 평화를 불러온다는 빛의 아글라, 붉고 흰 얼룩이는 환희의 축제 에우프다. 그리고 까맣게 생긴 막둥이는 꽃피는 풍요, 탈라라 부르기로 했다.

그런데 그 어항이 언 것이다. 얼음의 돋보기 효과 때문이었는가, 유난히도 큰 금붕어의 눈과 마주쳤을 때 나는 어떻게 해서든 살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도 같은 생각이었던지 주전자에 물을 끓여왔고 나는 급히 그러나 아주 조심스럽게 어항 속에 물을 쏟았다.

입김 같은 수증기가 올라오면서 어항이 숨 쉬는 소리를 냈다. 얼음이 녹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살얼음 사이에서 금붕어의 지느러미가 조금 움직이는 것 같았다. 헛본 것이 아니었다. 혹시나 했던 것인데 정말 금붕어들은 꿈틀거리더니 헤엄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빨간 비늘이 반짝이는 광채를 내며 부챗살 모양의 꼬리로 퍼져 간다. 그 가느다란 생명의 동선을 숨죽여 따라가던 아내와 나는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아이고! 살았다. 살아났구나. 장하다, 아글라! 힘내라, 탈라!” 어쩌면 그것은 금붕어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향해 외치고 있는 소리였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잠든 사이 매서운 추위는 문고리를 흔들지 않고 내 신부의 방과 너희들의 어항을 침범했다. 얼어붙은 너희들을 보고 나서야 처음으로 우리가 한 방에서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다. 나의 추위가 바로 너희들의 추위였다는 것, 나에겐 지느러미도 아가미도 없지만 어항 속 겨울을 함께 숨 쉬고 있었다는 것.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그동안 모르고 지내온 거다.

너희들 이름처럼 빛과 환희, 꽃피는 축제의 생명을 위해 오늘 아침 우리는 함께 겨울과 싸웠다. 그리고 그 추위 속에서 살아났다. 한 주전자의 끓는 물이 온 방 안의 냉기를 생기로 바꿨다. 미안하다. 절대로 다시는 연탄불을 꺼뜨리지 않겠다. 맹세하마. 그리고 아내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그건 내 아내와 앞으로 태어날 우리 아이들을 두고 하는 맹세였을 것이다.

그때 나는 갑자기 온 세상이 금붕어의 지느러미처럼 반짝이며 헤엄치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책장에 꽂힌 책들이, 언 잉크병이, 아내의 화장대와 방바닥에 벗어놓은 때 묻은 양말, 일상의 얼룩과 먼지들까지도 일제히 수면으로 떠올라 금붕어처럼 숨을 쉰다. 비릿한 냄새를 풍기며 유리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죽음과 생이 이마받이를 하는 전율의 순간, 추위를 밀어내면서 잠시 아주 잠시 동안 나는 어항인지 모태인지 모를 따뜻하고 조용한 공간 속에 있었다. 그리고 조금은 슬프기까지 한 그곳은 이미 10제곱미터의 단칸 셋방이 아니었다.

금붕어의 어항이 그것들이 태어난 강물과 바다로 이어지면서 지구 크기의 생명권으로 번져나간다. 늘 보던 것들이 낯선 얼굴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상한 몸짓으로 말을 걸어온다. 그것은 동화이기도 하고 과학이기도 하고 모르는 도시의 지도 같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어제 보던 그 어항이 아니라는 사실, 조금 전 얼음 속에 갇혀 있던 그 금붕어들이 아니라는 거다. 방 안의 모든 가재도구가 ‘살림살이’라는 우리 토박이말 그대로 서로 살리고 사는 생명력으로 가득 찬 모습으로 바뀐 것이다.

산소가 부족할 때 금붕어가 하듯이 나도 동그란 입을 아가미처럼 열고 심호흡을 했다. 새파랗게 추운 겨울 아침이 쨍하고 유리창 깨지는 소리를 내며 내 폐부 속으로 들어온다.

아! 살아 있다. 살아 있었구나. 전쟁과 피난살이 속에서 젊은이들이 겨우 매달려 산, 발레리의 시 한 구절이 있다. “바람이 부는구나. 아, 살아야겠다.” 그러나 이번에는 분명 남의 말로 된 시 한 구절이 아니었다. 그때까지 숨기고 살아온 내 굳은 생명의 살점을 만져보는 순간, 음표와 음표 사이에서 침묵하던 목청이 트인 것이다. 그리고 그때 나도 모르게 하얀 입김과 함께 튀어나온 말이 유레카였다. 유레카!

- 『생명이 자본이다』 중에서
(이어령 지음 / 마로니에북스 / 376쪽 /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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