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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수무책인 사랑이 좋다
날아가는 새의 그림자를 본 적 있다.

어느 날, 들판을 걸어갈 때였다.
무언가에 골몰해 앞만 보며 걸음을 내디딜 때였는데,
한순간 무언가가 내 눈앞을 스쳐 풀숲으로 사라졌다.
그것은 작고 재빨라 나로 하여금
마치 족제비과의 들짐승을 보는 듯한 착각에 들게 했다.

내 머리 위로 새 한 마리가
빠르게 지나쳐 어디론가 날아간 후였다.

나는 새의 그림자를 보는 순간
그때까지 골몰해 있던 생각들을 모두 땅바닥에 놓쳐 버렸다.
한낱 주워 담을 수도 없는 생각에 빠져 나는 몇 시간 동안이나,
아니 지난 몇십 년 동안이나 생을 허비하며 걸어왔다는
생각이 들자 무척이나 허망했다.
그깟 새의 그림자가 뭐기에
나를 또 다른 생각으로 이끌었던 것일까.

하늘 높이 날던 새는 지상에 가까워질수록
제 몸과 같은 크기의 그림자를 갖게 된다.
땅에 내려앉았을 때 새는
자신의 그림자와 동일한 비례가 된다.

태양 가까이 날아갈 때 꿈은
거대한 그림자로 지상에 그려진다.
그리고 지상에 내려앉았을 때 비로소 그 꿈은
구체적이며 만질 수 있는 현실이 된다.

내 눈에 들이닥친 새들처럼, 곧 겨울이 들이닥칠 것이다.

나는 사랑 앞에서나 겨울 앞에서나 속수무책인 게 좋다.

- 『나에게서 내리고 싶은 날』 중에서
(박후기 지음 / 문학세계사 / 238쪽 /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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