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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
육십 터널을 지나온 남자의 어깨가 차분하다. 어둡고 습한 터널에서 몸부림치며 방황하던 어깨선이 자리를 잡은 듯 보인다. 가슴에 일어나는 벌떡이던 혈기와 제어되지 않는 좌절감에 괴로웠던 남자, 그의 눈빛이 차분해졌다. 사라지지 않는 생의 억울함을 감추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삶의 흐름을 터득하고 비로소 순하게 받아들이게 된 걸까. 오늘 그가 있기 위해 천둥은 그를 흔들었고 번개는 그를 찔러댔다.

공기업에서 34년 3개월을 근무하며 젊음을 바친 남자는 명예퇴직 후 다른 직업에 발을 붙이지 못했다. 자신이 갖고 있는 기술직에 잠시 머물렀다가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그만두곤 했다. 남자에게 세상 사람들은 너무나 불합리했고 못마땅했다. 두루두루 어울리며 적응하지 못한 그는 매일 술을 마셨고, 딱 맞는 일을 찾아낸 듯 알코올에 젖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출근하듯 술을 마셨고 열심히 근무하듯 시시때때 알코올을 찾았으며 밤이 돼도 야근하듯 술에 젖어 들었다. 그에게 이제 다른 직업은 없는 듯 보였다.

남자가 술 마시는 일에 충실할 때 자식의 혼사는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 년 내내 쏟아지던 소나기가 잠시 멈추고 반짝 해가 날 때처럼 맑은 정신으로 상견례와 혼인식을 넘겼다. 자랑으로 여기던 자식 둘을 몇 개월 차이로 출가시킨 남자는 이제 허전해서 울었다. 그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보물, 청춘을 바쳐 키운 자식이었기에 더욱 소중했으리라. 세상을 다 잃은 듯 절망했다. 살 이유가 없다는 남자에게 삶은 소중한 것이라는 말은 바람이었다. 언제까지 이 어두운 터널을 걸어야만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늦은 밤, 전화가 울리고 술에 취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며 와달라고 하는데 위치파악이 안 된다. 다만 수십 년간 몸담아 근무한 직장 근처라는 감이 왔다. 남자는 자신의 젊은 날을 그리워하며 한창때 번듯하게 다녔던 근무지를 다람쥐처럼 맴돌곤 했다. 차를 몰고 달려가 보니 자전거는 쓰러져 있고 남자의 머리에선 피가 흘렀다. 재빨리 차에 태우고 병원 응급실로 달렸다. 몇 바늘을 꿰매며 터널 속을 지난다. 이 터널은 끝이 있을 것이고 그 끝을 벗어나면 빛 앞에 서게 되리라는 희망을 억지로라도 붙들었다. 빛을 향해 가는 길에 거쳐야 할 어둠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남자의 어깨를 자꾸 쓰다듬었다.

일주일쯤 우울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던 남자가 바람을 쐬러 나갔다. 휴대전화로 전화를 해 베란다 창밖을 내다보라는 것이다. 밖을 보니 뚝방 밑 개천 옆 바위에 걸터앉아 개미처럼 작아진 남자가 손을 흔든다. 10층 아파트를 바라보며 열심히 손을 흔드는 남자의 가슴이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긴 물줄기 옆에 작은 점처럼 앉아 있다. 홀로 바람 앞에 선 이 남자는 바람처럼 자꾸만 날아가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더 무거운 우울 속으로 사로잡혀 드는 것일까.

순천만이 떠오른다. 갯벌 사이 에스 라인의 굵은 획 하나, 일몰에 용암처럼 붉게 타는 물줄기다. 두 손을 모아 가득 뜨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물임에도 해지는 저녁이면 감탄을 자아내는 황금 줄기가 된다. 사람도 저녁 해를 받을 때 순천만의 물줄기처럼 아름다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짱뚱어와 온갖 갯벌 생물들이 어울려 살고 흑두루미와 노랑부리저어새 등 200여 종의 조류가 찾아드는 습지 사이로 묵묵히 흐르는 물줄기처럼 의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을을 넘기는 남자에게 인생길은 어두운 터널이다. 진정 순천만의 수로처럼 아름다운 저녁 시간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

남자에게 영어 회화를 배우자고 했다. 일주일에 두 번 수업이 있는 구청 구민회관에 나가자고 했다. 미국 샌디에고에 둥지를 튼 딸을 찾아가려면 영어는 필요하니 함께 하자고 했다. 그가 응했다. 딸을 연인처럼 아끼고 사랑한 아빠였기에 결심할 수 있었으리라. 다행히 강의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어설퍼하는 우리를 친구로 맞아 주었다. 학창 시절에 배웠던 잠자는 영어를 깨워 접목시키며 재미를 느끼는 동안 1년이 훌쩍 지났다. 남자는 점차 사람들과의 관계가 원만해졌다. 알코올에 젖어 있는 시간은 점점 줄었다. 터널을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인생의 가을은 바람이다. 지나갔는가 싶으면 또다시 찾아와 옷깃을 펄럭이게 한다. 걷잡을 수 없는 가슴앓이와 삶의 혼돈을 거쳐야 하는 길목 바람, 생의 길에 숨어있는 터널이다. 유대경전 미드라쉬에서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떠올린다. 괴로움도 즐거움도 지나가는 것, 삶은 흐름이다. 어두운 터널을 벗어난 남자가 온몸에 빛을 받는다. 눈빛은 순하고 어깨는 차분해졌다. 마라톤을 완주한 선수처럼 희망이 담긴 표정이 됐다. 한결 편안해진 남자의 삶이 수백 년 된 나무처럼 의젓하고 아름답다. 비바람과 천둥 번개가 다시 올지라도 그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34년을 함께 살아온 남편, 이 남자는 지금 빛 속에 있다.

- 『이 남자』 중에서
(김태실 지음 / 코드미디어 / 252쪽 /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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