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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의 식물
시코쿠 여행길에 얼마 전에 떠난 김수환 추기경을 닮은 사람을 만났다. 인중은 길었고, 얼굴이나 몸의 선은 둥글었다. 착해 보였다. 그의 법명은 세카이라고 했다. “석가모니와는 달라요. 나 또한 집을 나왔지만 석가모니처럼 스스로 나온 게 아닙니다. 나는 모든 걸 잃었어요. 아내도 자식도 재산도. 그렇게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고서야 집을 나올 수 있었어요.”

그 수도자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벌써 9년째 순례를 계속하고 있다는 60대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말했다. “저 스님은 절이 없어. 시코쿠 순례길이 저 스님의 절이지. 순례를 하며 그 속에서 수행을 하는 스님이야.”

사실은 거의 모든 순례자들이 그런 자세로 시코쿠를 걷지만, 난 특히 그에게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집이고 가족이고 다 잃었다고 했는데, 지금은 어때요? 편안해졌어요?” 그는 웃었다. “어느 순간부터 괜찮아졌어요. 순례와 잔게 수행 덕분이지요.” 잔게? 나는 수첩을 꺼냈고 그는 그 위에 썼다. ‘참회’라는 말이었다. “그래서 저는 모든 이에게 참회부터 하라고 말합니다. 참회 없이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는 게 제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것이다. 우리 모두는 틈틈이 내면의 거울을 닦아야 한다. 그래야 바로 볼 수 있고, 바로 행동할 수 있다. 시코쿠로 오는 배에서 나는 다짐한 바 있다. 만나는 모든 사람이 신이다. 선입견을, 겉모습을 넘어서야 한다. 그래야 순례에서 배운다. 그래야 다시 태어날 수 있다. 그 다짐을 떠올리며 나는 물었다.

“어떻게 합니까, 참회는?”

스님은 주머니에서 땅콩 봉지를 꺼내 땅콩 한 알을 내게 주며 말했다. “껍질을 벗겨보세요.” 나는 시키는 대로 껍질을 벗겼다. 그걸 내게서 받아든 뒤 그는 다른 한 손으로 땅콩의 한가운데를 가리켜 보였다.

“여기 보세요. 식물의 씨앗은 풀이든 나무든 모두 같습니다. 두 손을 한데 모으고 있습니다. 합장을 하고 있는 거지요. 씨앗은 합장을 하고 겨울을 지나 봄을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봄이 되면 합장을 하고 나옵니다. 손이 여럿인 소나무나 잣나무는 그 여러 손을 한데 모으고 나옵니다. 그렇게 공손하게 세상에 얼굴을 내밉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그 두 손을 가만히 펴는데, 그것은 찬양입니다. 감사지요. 앞으로는 식물의 씨앗처럼 걸어보세요. 그러면 당신은 나무처럼 흔들림 없는 평화를 맛볼 수 있습니다.”

세카이 스님의 말이 밤새 내 가슴을 떠나지 않았다. 다음 날은 비가 내렸다. 빗속의 팔십 리였다. 쏟아지듯 퍼붓는 소나기 아래서 내 판초는 금방 방수 기능을 잃었다. 판초를 뚫고 들어온 빗물에 옷이 젖기 시작했고, 그 느낌이 싫었지만 나는 비를 향해 욕을 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세카이 스님에게 배운 합장과 찬양, 그리고 감사였다. 비만이 아니었다. 바람도 드셌다. 그 바람이 도중에 사서 쓴 내 우산을 뒤집고 스게가사(삿갓)를 뒤로 벌렁 벗길 때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찬양과 합장과 감사뿐이었다.

여관에서도 시련은 그치지 않았다. 2,500엔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새 5,000엔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5,000엔 중 2,500엔은 이 지역의 독거노인들을 돌보는 비용으로 쓰고 있습니다.” 거동이 불편한, 그래서 밥조차 해 먹을 수 없는 독거노인을 모시고 보살핀다고 했다. 그날도 할머니 한 분이 그 여관에 머물고 있었다. 아름다운 일이었다. 나는 그 일을 향해 땅콩처럼 합장, 감사, 찬양했다.

그 여관의 시트나 욕의는 새것이 아니었다. 음식도 식당에서 배달해온 싸구려였다. 비가 오는 날인데도 그 여관에 손님이 나 혼자뿐인 이유가 그 때문인 듯싶었다. 그렇다. 그런 일들에도 불구하고 내게 허락된 일은 나무처럼 합장과 찬양, 그리고 감사하기뿐이었다. 할머니는 자주 화장실에 갔고, 그때마다 나무로 만든 마루에서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밤새 그치지 않아 잠을 설치면서도 나는 콩처럼 합장과 찬양, 그리고 감사를 해야 했다. 그 모두가 세카이 스님이 들려준 이야기 덕분이었다.

“가을에 땅콩이 거두는 열매를 떠올려 보세요. 한 알의 찬양과 감사가 수백 개의 열매로 돌아오지 않습니까? 그것은 땅콩이 비바람이나 천둥번개에도 불평 한마디 없이 합장, 찬양, 감사한 결과입니다. 멧돼지가 밟고, 벌레가 파먹어도 기꺼이 합장, 찬양, 감사한 결과입니다. 아셨지요? 어떤 일에나 합장, 찬양, 감사입니다.”

백 개의 열매는 몰라도, 그렇게 함으로써 열악한 환경에서도 마음이 편안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날 이후로 땅콩은 내 마음의 식물이 됐다. 그것만이 아니다. 땅콩으로 말미암아 그날 이후로 모든 식물이 내 마음의 스승이 됐다.

- 『시코쿠를 걷다』 중에서
(최성현 지음 / 조화로운삶 / 315쪽 / 13,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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