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1 경제포털
뉴스  ·  증권  ·  부동산  ·  금융  ·  자동차  ·  창업  ·  교육  ·  세무  ·  헬스  ·  BOOK  ·  블로그   
등록예정 2022년 11월 등록예정 도서요약
북다이제스트
        
아이디/패스워드 찾기
회원가입
INFO BOOK
뒷모습

베트남 고산지역, 해발 2,700미터. 이곳에는 몽족이 살고 있다. 그들을 찾아 나선 지 이틀째. 깊은 산길을 오르고 또 오르니 통나무로 지어진 집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곳이 몽족 마을임을 알리는 것은 낯선 모양의 집들이 아니라 무거운 짐을 지고 고갯길을 힘들게 오르는 저 여인, 그 여인의 등이었다. 그녀의 등에는 자신의 몸집보다 큰 땔감이 고통스럽게 매달려 있었다. 지게 같은 도구도 없이 거대한 땔감을 이마에 걸친 끈 하나로 위태롭게, 하지만 능숙하게 나르고 있었다. 그녀의 등에 매달린 것은 몽족 여인들의 삶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녀의 앞을,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뒤, 등은 이미 너무도 많은 말을 내게 건네고 있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인간의 원래 모습을 ‘등이 서로 붙은’ 암수 한 몸의 존재로 그리고 있다. 인간의 힘을 두려워한 신들은 암수를 독립적인 존재로 갈라놓았고, 인간은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야 하는 사랑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서글픈 것은 결코 볼 수 없는 등, 즉 안을 찾아야 하는데 그것 대신 앞, 즉 겉의 모습만을 보면서 반쪽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안에 담긴 진실들이 겉의 표상에 가려져 존재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침묵이 언어에 가려져 비존재로 인식되는 것처럼 말이다. 침묵은 언어라는 구름이 수놓아지기 위한 바탕, 하늘이다. 언어라는 구름은 영원히 그리고 완벽하게 침묵의 하늘을 가릴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의 인식과 감각은 구름이 먼저다. 타인의 앞만을 보고 그의 뒤, 등의 존재에는 무관심한 것처럼. 하지만 분명, 타인의 진실은 그의 등 뒤에 존재한다. 침묵하고 있는 등 뒤에.

등, 뒷모습, 그것은 밤이다. 칠흑같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런 밤. 하지만 밤은 섬뜩하리만큼 분명하게 살아서 움직인다. 밤은 한낮의 태양 혹은 그것보다 강렬한 타인의 눈 속에 숨어 있던 진실과 욕망이 잠을 깨는 시간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앞모습뿐이었다. 화려하게 덧칠한 입술, 본래보다 크게 그려진 검은 눈, 장식으로 철저하게 가려진 몸. 태양이 주체의 시선을 통제하여 낮에는 뒷모습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오면, 희미하지만 순수한, 그래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의 달이 뜨듯이 뒷모습은 앞모습이 말하지 못했던 혹은 말할 수 없었던 것들, 진실과 욕망을 어둠보다 진하게 풀어놓는다.

이렇게 진실은 뒷모습에 살아 있다. 나는 나의 진실을 어쩔 수 없이, 나의 소유가 될 수 없는 뒷모습에 감추고 있다. 내가 타인에게 미소를 지어 보여도 뒷모습은 울고 있으며, 내가 타인에게 소리치며 허세를 부려도 뒷모습은 허무에 짓눌려 우울해하고 있다. 타인 혹은 세상에 저항하지 못하고 자유를 상실한 앞모습과 달리 뒷모습은 직설적이면서도 서글프게 나의 진실을 품고 있다. 나는 의식적으로 그것을 감추고 있지만 돌아서는 순간 밤이 달빛으로 존재하는 것들의 숨겨진 욕망을 들춰내듯이 나의 뒷모습에 위태롭게 매달린 진실을 타인은 침묵으로 읽어낸다. 이렇게 나의 뒷모습은 나의 주인이지만 나의 것은 결코 아니다. 타자에 의해 고스란히 해석당할 수밖에 없는 타자의 것이다.

한편 우리의 뒷모습은 타인에게 진실을 드러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타인의 관음적 욕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에서 사냥지기 클리퍼드가 코니의 엉덩이에 찬사를 보내면서 “당신의 뒤쪽이 정말 매력적이군요……. 이 세상을 떠받칠 수 있는 엉덩이군요!”라고 말했던 것처럼 우리의 뒷모습, 특히 세상의 어떤 둥근 원보다 아름답고 매력적인 엉덩이는 타인의 비밀스러운, 하지만 공개적인 시선의 쾌락물로 변화된다. 우리는 상대방을 유혹하기 위해 앞모습을 치장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모습에, 특히 육감적인 부분에 이르러서는 당당하면서도 솔직한 시선으로 머물 수 없다. 하지만 꾸미지 않은, 꾸밀 수도 없는, 자연을 닮은 곡선의 뒷모습은 주체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타인의 욕망이 소유해 버린다.

그러나 인생의 해가 질 무렵, 타인에게 빼앗겼던 뒷모습은 타인에게서 주체에게 조용히 되돌아온다. 그것은 한낮의 뜨거운 태양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해질녘 구름에 가려 빛을 잃어가는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과 같다. 조금이라도 뒷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꼿꼿하게 어깨를 펴고 걷던 젊은 날은 가고 좁아진 어깨와 구부러진 허리가 뒷모습을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뒷모습을 세상 혹은 타인에 당당하게 내놓는 것이다. 뒷모습에 감추었던 자신의 진실을 누구에게나 거리낌 없이 보여주고, 진실이 타인에게 드러났다고 해서 가슴을 졸이거나 슬퍼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 그들은 신 앞에서 땅에 머리를 대고 기도하는 동안 조금의 가림도 없는, 온전한 뒷모습을 세상에 겸허하게 드러내 보인다. 이것은 젊은 날 앞모습에 집착했던 고뇌에 대한 참회의 눈물이다. 당당했던 하지만 가식적이고 허구적이기만 했던 앞모습을 버리고 시간의 무게에 아름답게 다듬어진 뒷모습을 신에게 바치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숨기고 혹은 무엇으로 자신을 은폐하고 있는지를 물을 때 잃어버렸던 뒷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 『부유하는 단어들』 중에서
(최인호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52쪽 / 13,000원)
번호 | 제목 | 날짜
44 뒷모습 2015년 03월 30일
43 2015년 03월 02일
42 그래도 콩깍지 2015년 02월 02일
41 산이 날 에워싸고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2014년 12월 31일
40 4분의 1의 나와 4분의 3의 당신 2014년 12월 01일
39 로렐 씨와 함께하는 우주여행 2014년 10월 31일
38 사막에서는 오로지 자신만을 만날 수 있다 2014년 09월 30일
37 내 영혼의 식물 2014년 08월 28일
36 이 남자 2014년 07월 30일
35 속수무책인 사랑이 좋다 2014년 06월 30일
단체회원가입안내
독서퀴즈이벤트
나도작가 신청안내
무료체험
1분독서영상
한국독서능력검정 신청
모바일 북다이제스트 이용안내

인재채용 | 광고안내 | 구독신청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용약관 | 서비스문의 이용문의:mkmaster@mk.co.kr
회원문의:usrmaster@mk.co.kr
매경닷컴은 회원의 허락없이 개인정보를 수집, 공개, 유출을 하지 않으며 회원정보의 보호를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