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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날 에워싸고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시 한 줄의 의미가 삶의 지향에 영향을 줄 때가 있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 늦봄이었다. 마침 금요일 개교기념일이어서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할머니 집에서 쉬게 되었다. 나는 피난지 대구에 살고 있었는데 할머니 집은 남쪽으로 130리 떨어진 건천에 있었다.

목요일 저녁에 기차를 탔다. 밤이 깊어서 고향 역에 내렸다. 역에서 할머니 집까지 가기 위해서는 논둑길을 걸어 5리쯤 가야 했다. 저수지에서 물을 대놓아 논바닥은 달빛에 젖어 반짝거리고 있었다. 어두운 밤길 달빛이 밝았지만 그래도 좁은 논둑길을 조심스럽게 걸었다.

논둑을 벗어나 마을 가까이 야산 자락에 다다랐다. 야산은 검은 소나무 숲이었다.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산꼭대기에 서 있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온몸이 굳었다. 그때만 해도 산속에 숨어 있던 공비가 자주 마을에 내려와 쌀을 털어가기도 하고 마을 사람들을 잡아가기도 했다.

나는 얼른 길을 벗어나 수풀에 숨었다. 숨을 죽이고 가만히 산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그 사람은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그가 느린 걸음으로 가까이 왔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때 “동규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가까이 서 있는 사람은 삼촌이었다. 삼촌은 내가 고향에 내려올 줄 알고 산꼭대기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날 밤 삼촌과 나는 산꼭대기 너른 바위 위에 앉아 하얗게 달빛에 젖어 있는 고향 마을을 내려다보며 한동안 앉아 있었다. 삼촌은 나에게 장래 희망을 물었고 나는 엉뚱하게도 군인이 되겠다고 했다. 삼촌은 그때 나이가 서른이 넘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깊어진 폐결핵으로 고향에서 투병 생활을 하고 있었다. 삼촌은 내 장래 희망을 듣고는 빙긋이 웃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내가 궁금하여 삼촌을 쳐다보자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아버지의 <산이 날 에워싸고>라는 시를 잘 알고 있지?”

삼촌은 캄캄한 밤하늘을 향해 이 시를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내 어깨에 손을 얹고 조용히 타일렀다.

“군인이 되는 것은 직업을 가지는 것이지만 어떤 직업의 자리에서 일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야. 어떤 사람이 그 자리에서 일하는가가 중요한 것이지.”

그땐 그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고 나서 내가 대학에 입학한 해에 삼촌은 돌아가셨다. 장례식을 마치고 고향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우연히 삼촌이 남기고 간 일기책을 보게 되었다.

“들찔레처럼 자리를 가리지 않고 꽃을 피우며 보는 이 없어도 향기를 피우며 뻗어가는 그런 생명력을 지니고 산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쑥대밭처럼 무성하게 살다가 가을이 와서 줄기조차 붉게 시들어도 바람이 불면 울 줄 아는 그런 삶을 산다는 것은 꿈이다”

삼촌이 남긴 그 구절은 서울로 돌아와서도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대학 교수가 되던 해, 아버지와 마주 앉아 삼촌의 이 글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는 “삼촌이 형의 시라서 마음에 더 깊이 새겨 두었나 보지” 하면서 목이 잠기셨다. 그리고 내 손을 잡고 “찔레꽃처럼 아니 쑥대밭처럼 살고 싶었던 아버지의 마음을 기억해 다오”라고 하셨다.

나는 그 뒤로 아버지가 눈물 어린 얼굴로 말하던 삶의 세계를 잊어본 적이 없다. 찔레꽃처럼 보는 이 없어도 향기를 품고 스스로 강한 생명력으로 자신을 키워 자연과 어울리는 분수의 삶을 그리며 살았다. 쑥대밭처럼 무성하게 어울려 살아가는 공동의 삶을 생각하면서 손을 벌려 잡아주고 바람이 불면 함께 울 수 있는 그런 삶을 바라왔다.

이처럼 아버지의 시가 내 삶의 깃발이 되어왔다. 아무렇게나 살 수밖에 없었던 어린 나에게 인간다운 삶의 이상을 쑥대밭 수풀을 바라보며 그리게 하고, 세속적 욕망에 번민하고 참다운 인간됨에 목말라 할 때 찔레꽃처럼 연약하고 덧없어 보여도 싱싱하고, 멋없어 보여도 소박하고, 가진 것은 없어도 향기를 허공에 뿌리는 힘을 삼촌과 아버지는 주었음을 고백한다.

- 『아버지는 변하지 않는다』 중에서
(박동규, 박목월 지음 / 강이 / 240쪽 /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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