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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리조나 주 야바 파인즈 캠핑장엔 유난히 길이 많았다. 대로와 소로와 오솔길들. 캠핑장에 머무는 며칠 동안 가장 아꼈던 시간은 혼자 걷는 새벽 산책이었다. 이른 아침 새로운 길을 찾아 걷는 기쁨이 컸다. 맑고 청순한 공기 속을 걷노라면 어디서든 풀꽃 향기가 났다. 길이 많음으로 인한 선택의 갈등은 없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나 있어 어차피 모든 길을 다 갈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므로. 또 길이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갈라지다가 결국 한곳으로 통하여 만난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가랑비가 흩뿌리는 어느 새벽, 새로운 길을 걷다가 소나무를 벌목하여 높게 쌓아놓은 통나무 더미를 지나게 되었다. 가지와 뿌리가 잘려나가 생명 잃은 원목들이 길게 길게 누워 있었다. 마음이 삽시간에 경건해졌다. 나는 보았다. 수많은 나이테. 나무가 살아온 길. 비슷한 장소, 비슷한 환경 아래 자랐을 테지만 그것들은 각각 다른 모양과 빛깔을 지니고 있었다. 너그러운 삶. 평화로운 삶. 고통스러운 삶. 유난히 거친 세파를 헤쳐온 삶. 갖가지 사연과 역사를 지닌 나무의 족적, 족적들.

작은 통나무 하나를 골라 나이테를 세어보니 일백 개가 훌쩍 넘었다. 겉껍질만 해도 수십 켜, 곱고 둥그런 나이테 중간중간엔 본연의 형태를 잃고 구멍이 뚫려 텅 빈 공간들이 있었다. 아픈 흔적들. 삶의 초기에 깊은 상처를 입은 나무도 있고 다 성장한 후에 고난을 당한 나무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지 상처 때문에 더 자랄 키가 자라지 못했거나 나무의 생명이 그 상처 때문에 지장을 받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상처는 골이 팬 모습 그대로 굳어진 채 다른 부분과 연결되어 자라 있었다. 건강한 세포들이 아픈 상처들을 감싸 안고 같이 자란 흔적을 발견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비록 형태는 어그러졌을망정 더 많은 수액과 영양을 공급하여 상처를 다독여 준 흔적.

이 나무들 앞에서 내 삶을 논한다는 것은, 그동안 겪었던 삶의 설움들을 하소연한다는 것은 송구한 일이었다. 지난 세월, 영혼의 어두운 밤 지나느라 옆을 돌아볼 여유도 없었는데, 애증의 무성한 가지에 이는 바람에 흔들리는 마음을 지키느라 늘 괴로웠는데, 난 지금 여전히 살아 있다. 삶의 고난과 고통 때문에 죽지 않았다. 누군가의 보살핌으로, 아픔까지도 송두리째 껴안아 주는 사랑으로 인해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다.

옹이들도 보았다. 상처들.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이 옹이에는 한때 부드럽고 향기 가득한 꽃물이 머물렀으리라. 한때 순하고 여린 시절이 있었으리라. 앓는 동안 가장 단단한 버팀대가 되었으리라. 하지만 옹이는 여전히 옹이. 고통의 대명사. 아픔은 여전히 아프고 슬픔은 여전히 슬프다. 지나온 나의 삶의 나이테는 어떤 무늬일까. 쭉쭉 펼치지 못하고 움츠러든 나이테. 좁고 어둡고 단단한 나이테. 보일 듯 말 듯 가늘게 이어진 나이테. 20여 년 전 이민의 삶을 시작했을 때에는 분명 동서남북도 분간할 수 없었을 것이다.

통나무 하나를 무심히 코에 대어 보았다. 베인 지 이미 상당 기간 지났을 터인데 아직도 이만한 향을 간직하고 있다니. 아득했다. 죽어서도 품어 내는 향기. 생명이 다한 지 이미 오래여도 여전히 향기를 품고 있는 나무. 나의 삶은 어떤 향기를 지니고 있을까.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 산 너머로 동이 터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호리의 오점이 없는 순수. 은총처럼 온몸을 감싸 안는 빛줄기. 빛의 세례. 빛의 다이아몬드가 수천수만 갈래의 길을 타고 환상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순간에 나는 알았다. 다이아몬드가 귀한 이유. 희귀해서만도 아니요, 단단해서만도 아니요, 바로 그 내부에 수많은 길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가장 작은 표면적에 가장 많은 길을 품어 안은 보석. 그리고 그 길에는 빛이 걸어간다. 빛이 달린다. 다이아몬드 길에 들어선 빛은 영원히 굴절과 반사와 순회를 거듭하며 쉼 없이 달리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도 다이아몬드가 반짝이는 것은 이미 오래전 그 안에 감싸 안은 빛 때문이다.

다이아몬드의 가치는 크기나 무게보다, 선명도나 빛깔에 더 많은 비중을 둔다. 선명도나 빛깔은 절단에 의해 결정된다. 절단면이 얼마나 고르고 섬세하고 정교한지, 다른 절단면과 얼마만큼 정확한 각도와 조화로 구성되어 있는지, 들어온 빛이 도망할 여유를 주지 않고 연속방사를 할 수 있도록 얼마나 많은 절단면을 지니고 있는지에 따라 정해진다. 절단이 잘되었는지는 빛으로 점검된다. 똑같은 양과 질의 빛이라 할지라도 절단면의 상태에 따라 탁하게 혹은 아름다운 무지개 색으로 투영되는 것이다.

내 인생의 절단은 무엇일까. 한 가닥 빛을 투명하고 아름답게 반사하기 위해 내게 다가오는 상실과 외로움, 혹은 절망의 절단 과정을 잘 견뎌야 한다. 빛으로 가는 길이므로. 모든 삶에는 길이 있고, 내게도 분명 가야 할 길이 있다. 때때로 그 길이 흑암에 갇혀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확실한 것은 내 앞에 길이 있다는 것이며, 그 길을 즐겁게 가리라는 것이다.

- 『나는 낯선 곳이 그립다』 중에서
(하정아 지음 / 푸른길 / 294쪽 / 1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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