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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모래 위로 바람은 불어가고
내가 처음 해외여행이라고 간 것은 40대 초반, 시안에서 출발하여 둔황을 거쳐 우루무치로 가는 타클라마칸의 사막길, 이른바 실크로드였다. 20여 년 전이니까 중국이 막 개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몇몇 글쟁이 친구들과 함께했는데 우리는 먼저 상해로 갔다.

상해 거리로 들어선 순간, 빨래가 널린 허름한 뒷골목과 함께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거리에 몰려다니는 수많은 인간 군상이었다. 세상에나!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몰려다니는지 마치 큰 강의 사람 물결 속으로 들어온 느낌이었다. 그 속의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우리는 시안에서 기차를 탔다. 기차는 누런 황토물이 넘실대는 황하를 건너, 하서회랑을 지나 서쪽으로 서쪽으로 달렸다. 당시 기차는 지금처럼 빠르지 않아서 시안에서 둔황까지 가는 데 3일이 걸렸다.

그때 내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광막한 사막, 열사의 바람이 쉴 새 없이 불어오는 창문 너머 가도 가도 끝없는 지평선을 따라 펼쳐진 사막이었다. 좁은 반도에서 태어나 좁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던 내게 사막은 경이, 그 자체였다. 나는 그동안 내가 보물처럼 지키고 있던 ‘나’라는 것이 서서히 부서지고 해체되는 것을 느꼈다. 상해에서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 ‘나’가 한 번 부정되고 나서 두 번째 경험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훨씬 강렬하고 근본적인 것이었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유도 없었다. 그저 울고 싶을 뿐이었다. 부수어지고 해체되어간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내가 매달렸던 세상, 내가 매달렸던 생각들, 내가 지금껏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들이 부질없이 사막의 뜨거운 열풍 속에 날려갔다.

3박4일의 열차여행 끝에 우리는 마침내 꿈에 그리던 둔황에 도착했다. 둔황은 사막 위에 떠있는 섬과 같은 곳이다. 둔황에서 보낸 며칠은 꿈만 같았다. 자전거를 빌려 타고 시골 마을로 돌아다니다가 냇가에 앉아 수박을 깨어 먹었다. 매미 소리 울려 퍼지는 푸른 하늘엔 흰 구름이 마치 아이들이 도화지에 그려놓은 것처럼 둥둥 떠 있었고, 밀밭과 목화밭이 평화롭게 가로놓여 있었다. 그리고 밤에는 별들이 하늘 가득히 등불처럼 피어올랐다.

그곳에서 며칠을 보내고 나서 마지막 날 새벽, 나는 혼자서 천천히 시 외곽으로 나가보았다. 바람이 몹시 불던 날이었다. 외곽은 드넓은 사막이었다. 사막을 경계로 심어놓은 키 큰 백양나무가 바람을 맞아 건들거렸다. 누런 모래가 하늘 높이 회오리를 만들었다. 그때 내 눈에 무언가가 펄럭이는 게 보였다. 작은 봉분 위에 얼키설키 세워놓은 깃발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무덤이었다.

무덤은 정해진 위치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사막 여기저기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는데, 바람에 날려가고 나면 그 위에 누군가가 다시 무덤을 쓰곤 할 것이었다. 얼마나 많은 세월, 얼마나 많은 무덤들이 세워졌다 사라지곤 했을 것인가. 바람과 시간의 여울 속에 누군가의 흔적이 그렇게 쉽게 지워지는 풍경을 보며 나는 그토록 오랫동안 나를 짓누르고 있던 어떤 강박관념으로부터 서서히 벗어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만일 우리에게 죽음이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죽음이 없는 삶이란 종착지 없는 마라톤이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마라톤.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지옥과 같을지도 모른다. 박완서 선생의 수필 중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에 이런 글이 있다. 작가가 시내에 갔다가 우연히 마라톤 대회를 보게 되었다. 누가 1등을 하나 보기 위해 달려갔으나 선두 주자들은 이미 지나가버리고 맨 후위 그룹의 선수들이 힘겹게 뛰는 중이었다.

나는 그런 표정을 생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여직껏 그렇게 정직하게 고통스러운 얼굴을, 그렇게 정직하고 고독한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가슴이 뭉클하더니 심하게 두근거렸다. 나는 그를 향해 열렬한 박수를 보내며 환성을 질렀다.


한평생을 그렇게 완주한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면 그것이 완주이다. 그렇게 자기 인생을 완주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다정한 어머니 얼굴을 한 죽음이다. 어머니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아들아, 딸아, 수고했구나. 힘들었지? 이제 편히 쉬어라.” 아무리 잘 살았고, 행복하게 살았다 해도 생은 그 자체가 무거운 짐이었으리라. 죽음은 어머니처럼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 모든 짐을 내려놓게 한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여행하고 와서 내내 내 마음 속에 떠오르던 말은 바로 ‘생에 대한 겸손’이었다. 소멸이 없다면 이 살아있음조차 무엇이 귀할 것인가. 어쩔 수 없는 것 앞에 우리는 겸손하지 않을 수 없고, 순종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나는 몸이 몹시 아프거나 힘들 때면 그때 지나갔던 그 사막길을 떠올린다. 파란 하늘에 정처 없이 떠 있던 하얀 구름…… 그리고 일찍이 누군가의 육신이었을 하얀 해골을……. 그러면 나는 편안하게 숨을 한 번 들이킬 수 있다.

- 『죽음에 관한 유쾌한 명상』 중에서
(김영현 지음 / 시간여행 / 248쪽 /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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