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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절망과 분노가 애매하기에
행복한 의사 부부가 있습니다. 아들 하나, 딸 하나를 키우며 삽니다. 어느 날 남편의 남자 후배가 그 아내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아내는 번민과 갈등에 휩싸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뭔가가 있음을 눈치 챈 의사 남편은 둘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귀여운 딸이 유괴범에게 납치돼 살해되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절망과 분노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부부.

그런데 사형수가 된 유괴범에게도 딸이 있습니다. 의사 남편은 그 딸을 입양해 키우자고 합니다. 불륜한 아내에 대한 복수입니다. 아내도 그 아이에게 죽은 자기 딸의 복수를 하고자 작심을 하고 데려다 괴롭힙니다. 물론 소녀는 유괴범의 딸이 아닙니다. 부부에게 입양을 부탁받은 친구 의사가 차마 그럴 수는 없어 다른 아이를 데려다 유괴범의 딸이라고 거짓말을 한 거죠.

너무도 순수하고 고운 마음씨를 가진 죄 없는 소녀. 그런데 부부의 아들이자 그녀의 오빠가 그녀를 여자로서 사랑하게 되고, 엄마의 증오는 더해 갑니다. 결국 자신이 유괴범의 딸로 입양됐으며 증오와 복수의 표적이 되었음을 소녀도 알게 됩니다. 길은 하나뿐, 소녀는 하얗게 눈 덮인 숲길을 걸어 강에 이른 뒤 강물로 몸을 던집니다.

장면은 병원 응급실로 바뀝니다. 침대 위에 사경을 헤매는 소녀가 누워 있습니다. 그 주위를 죄인들이 둘러쌉니다. 복수에 눈이 먼 부부, 근친상간의 충격을 준 오빠, 거짓말한 친구 의사…… 모두 모두 모였습니다. 아직도 남편은 아내가 밉고, 아내는 자신을 부정한 여자라 의심하고 증오해 온 남편이 밉습니다. 아들은 그런 부모들이 밉고, 의사 친구는 부부가 한심하겠죠. 또 이 가족은 입양 과정에서 자기들 모두를 속인 그가 원망스럽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차가운 냉기가 풀풀 날리던 얼어붙은 병실에 변화가 일기 시작합니다. 차갑게 식었던 소녀의 맥박이 미약하게나마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그때부터입니다. 심장의 고동이 느껴질 듯 말 듯, 여리고 힘겹게 한 번 뛸 때마다 모인 사람들의 얼굴이 변해갑니다. 희망으로, 간절함으로, 서로의 손을 꼭 쥐고 한마음이 되어 소녀의 맥박을 쫓아갑니다. 그 작은 심장의 희미한 고동이 수십 년의 차가운 벽을 허물기 시작합니다. 차가움과 증오를 녹이기 시작합니다. 그 심장의 여린 고동을 따라 사람들은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하며 구원에 이릅니다. 모두 구원에 이릅니다.

미우라 아야코의 『빙점』 줄거리지요. 이 소설을 애증과 갈등 구조에 입각해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이 소설은 지극히 종교적입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힘은 무얼까요? 그건 거대하고 강한 힘이 아니라 가장 약한 사람, 죄 없는 사람의 희생이라는 놀라운 진리를 일깨워 주는 장면이지요. 기독교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마구간의 아기 예수가 그랬고, 벌거벗겨진 채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예수가 그랬습니다. 자기 생명을 지키기는커녕 생명을 빼앗으려는 악의 힘에게 반항조차 없었지만 그것으로 해방과 구원의 역사를 시작한 것입니다.

소설 『빙점』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생과 죽음 사이를 오가는 주인공을 지켜보며 자기들이 저지른 일과 죄 없는 이의 희생에 대해 정직하게 반응한 덕분에 자기 자신과 화해하고 자기에게 상처를 남긴 사람과 화해했습니다.

소설대로라면 우리도 그처럼 죄 없는 이들의 안타까운 죽음 앞에서 모든 벽을 허물고 골을 메우면서 하나가 되어 갔어야 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 사회는 그런 죽음 앞에서조차 정파와 정략을 떠올립니다. 통렬한 회개와 자기 성찰이 필요한 자리에서 이념이 등장하고 편이 갈라집니다. 어떤 사람들의 망언은 같은 하늘 아래 그런 사람과 살고 있다는 것이 경악스러울 정도입니다. 장갑차에 치어 숨진 두 소녀에 대한 애도는 반미좌경으로, 세월호 참사에서 바닷속에 가라앉은 생명들은 보상체계와 같은 비본질적인 것으로, 조속히 잊히도록 강제되었습니다.

안타까운 죽음들을 기억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 죽음들을 멀뚱히 바라보다 잊어 가는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힘에 맞서는 것입니다.


물론 국가와 언론의 힘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우리의 분노와 절망이 애매했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것이죠. 부디 아픔에 대한 기억이, 힘없고 소외되어 그늘 속에서 살아가는 이웃들 앞에, 우리가 쌓아 온 차별과 우월 의식의 실상 앞에 우리를 세워 우리 자신을 똑바로 볼 수 있도록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우리 스스로를 넘어섬으로써 우리가 그 희생들을 더욱 값진 것으로 만들어야겠습니다.

- 『인생, 강하고 슬픈 그래서 아름다운』 중에서
(변상욱 지음 / 레드우드 / 288쪽 / 13,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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