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1 경제포털
뉴스  ·  증권  ·  부동산  ·  금융  ·  자동차  ·  창업  ·  교육  ·  세무  ·  헬스  ·  BOOK  ·  블로그   
등록예정 2022년 11월 등록예정 도서요약
북다이제스트
        
아이디/패스워드 찾기
회원가입
INFO BOOK
좋은 어른
내게는 문신이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오른팔에 쓰인 글귀가 무슨 뜻인지 물어왔고 나는 그때마다 비밀이라고 말했다. 대단한 글귀라서가 아니다. 이런 종류의 말은 남에게 권할 것이 아니라 입 다물고 내가 혼자 조용히 지켜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주의자가 되자, 하지만 가슴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간직하자.” 68혁명 당시 체 게바라가 한 말이라고 알려진 글귀이지만 사실 내게는 그게 누가 한 말인지보다 문장 자체가 더 중요했다. 철저한 현실주의자로 상황을 냉정히 판단하고 행동하되 결코 이루어질 리 없는 뜨거운 무언가를 그 기반에 두자는 것.

이 생각은 내게 참 소중했다. 내가 만난 많은 어른들은 정확히 그와 반대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겉으로 몽상가처럼 세상에 관한 따뜻하고 근사한 말을 늘어놓되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단 한 치의 손해도 용납할 수 없다는 뜨거움으로 그를 믿어왔던 이들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했던 건 딱히 남들보다 악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행동하는 편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데 훨씬 더 쉽고 편리하기 때문이라는 걸 말이다. 그게 내가 살아오면서 목격하고 학습한 이 세상의 ‘어른스러움’ 혹은 ‘사회화’였다.

스물두 살이었다. 군대를 제대했지만 복학하지 않았다. 등록금과 집세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건설현장에서 모래를 고르는 일부터 아무개 브랜드의 피팅모델까지 하루에 몇 개씩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러다 일확천금의 부푼 꿈을 안고 시작한 일이 텔레마케팅이었다.

팀장은 다소 비만 체형이었고 나이는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서른쯤으로 보였다. 부장은 바싹 말랐고 그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보였다. 물건을 팔기 위한 전화 통화 시나리오를 각자 써냈다. 내 것이 채택되었고 나는 곧장 부장의 신임을 얻었다. 육체노동이여 안녕, 우리는 차량에 설치하는 GPS를 팔았다. 당시의 GPS는 화면 같은 게 없었고 그냥 과속카메라가 있을 때 음성으로 신호를 보내주는 역할을 했다. 나는 그걸 엄청나게 팔았다.

부장과 인사동의 작은 민속주점에서 술을 마셨다. 그는 좋은 어른으로 보였다. 부장은 가족 이야기도 하고 정치 이야기도 하고, 무엇보다 우리 팀원들이 하나같이 자식 같고 가족 같은데 한창 공부해야 할 시기에 이렇게 나와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게 안타깝다, 그래서 더 잘해주고 싶다, 그런 이야기를 했다. 아, 나는 엄청나게 감동했다. 그리고 저런 어른이 되어서 나중에 나보다 어린 청년들에게 똑같은 이야기를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부장은 9월 25일 도망쳤다.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는 건 그날이 월급날이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출근했더니 사무실 문은 잠겨 있었고 아이들은 그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보다 한 살이 더 많다는 이유로 대책위원장 비슷한 것이 되었다. 팀장을 찾아가봤지만 자기도 피해자라는 말 이외에 별게 없었다. 부장은 사무실 집기와 직원들의 두 달 치 월급을 챙기고 사라졌다. 경찰서와 노동청을 방문해 이런저런 서류를 작성하면서 나는 참 마음이 복잡했다. 무엇보다 그 좋은 부장이 왜 이런 일을 벌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거의 두 달이 지나서야 부장을 만날 수 있었다. 그가 먼저 연락을 해왔다. 동대문 이대병원 앞에서 만났다. 부장은 자기를 그만 괴롭히라고 말했다. 돈이 있으면 주지 않겠느냐며 자기는 가족이 전부 흩어져서 고시원에서 힘들게 살고 있다고 했다. 나는 원래 고시원 살았다는 말이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다가 목젖에 걸려 허우적대며 도로 들어갔다. 부장이 너무 낯설어 보였다. 나는 그게 무척 슬펐다.

이후로 많은 어른들을 만났다. 나는 불행하게도 좋은 어른을 많이 만나보지 못했다. 그저 나의 박복함의 결과인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한 건 최악의 어른이란 늘 갱신되고 있다는 것이다. 상황은 내가 어렸을 때보다 더 나빠졌다. 아주 잠깐 불었던 20대 청년운동의 바람은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윽박 아래 수렴되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세상 위로 첫발을 내딛는 사람들은 점점 더 불리해지고, 그 불리함은 더욱더 당연한 것으로 치부되었으며, 젊은이들은 거짓 위로로 가득 찬 힐링 스폿들로 도피했다. 어른들이 만든 체계가 하나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그걸 안전하다고 믿었던 아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이 명백한 죽음을 두고도 어른들은 좌와 우를 나누어대며 남겨진 자들을 능욕했다.

나도 이제 그들의 나이에 가까워졌다. 정말 무서운 건, 나도 그런 종류의 어른스러움에 너무나 익숙해졌다는 사실이다. 나는 늘 좋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어른이란 자기보다 어리고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양보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겉으로 냉정하되 속으로 상대를 이해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내가 되고 싶은 어른으로 나이 먹어가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그날 멀어져가는 부장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던 20대의 내가 지금의 나를 만났을 때, 그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할지 잘 모르겠다. 나는 그게 너무 부끄럽고 슬프다.

- 『나의 친애하는 적』 중에서
(허지웅 지음 / 문학동네 / 324쪽 / 15,000원)
번호 | 제목 | 날짜
64 좋은 어른 2017년 02월 06일
63 높은 곳 2017년 01월 02일
62 셰익스피어의 잃어버린 7년 2016년 12월 01일
61 맛있게 우는 법 2016년 10월 31일
60 세상을 빛나게 하는 작은 친절 2016년 10월 04일
59 우리의 절망과 분노가 애매하기에 2016년 09월 01일
58 사막의 모래 위로 바람은 불어가고 2016년 08월 01일
57 『채식주의자』에 나타난 음식 모티프와 “소극적” 저항 2016년 07월 01일
56 여행 후에 일어나는 것들 2016년 06월 02일
55 마음은 내일에 사는 것 2016년 05월 02일
단체회원가입안내
독서퀴즈이벤트
나도작가 신청안내
무료체험
1분독서영상
한국독서능력검정 신청
모바일 북다이제스트 이용안내

인재채용 | 광고안내 | 구독신청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용약관 | 서비스문의 이용문의:mkmaster@mk.co.kr
회원문의:usrmaster@mk.co.kr
매경닷컴은 회원의 허락없이 개인정보를 수집, 공개, 유출을 하지 않으며 회원정보의 보호를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